Final publication date 31 Oct 2016
한국의 아파트 공급과 수요의 역사적 연원에 관한 연구 : 해방 이후 주택의 수직적 집적화 과정을 중심으로
Abstract
From a perspective of housing policy, this study attempts to trace the origin of apartment in Korea, both owner-occupied and rental multi-family housing, which has widely been used as a means of housing supply through vertical accumulation of housing units. It identifies a series of government plans to build apartments to ease housing shortage resulted from massive immigration after the liberation in 1945 and destruction of housing stock during the Korean War of 1950~53. In 1955 two-storied houses were built as the first housing where units were separated by floor. International aids after the War, particularly those from American private and non-profit sectors, had a great impact on implementing full-scale apartments to increase land use efficiency of housing supply, while earlier apartments in Japanese colonial era had only a limited influence. Finally, on housing demand side, it is empirically estimated that apartment became popular in terms of accepting high-rise residence in late 1960s because the highest price originally attached to the ground floor shifted to the second floor in 1967 and to the third floor in 1968.
Keywords:
Apartment, Multi-storied House, Housing Policy, Housing Shortage, Korea키워드:
아파트, 다층주택, 주택정책, 주택부족, 한국Ⅰ. 서 론
한국의 첫 아파트로 일컬어지는 종암아파트가 1957년 11월 건립(한국주택협회, 1995)된 이래, 약 6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주택시장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아파트는 1975년만 해도 주택재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에 불과했으나, 2010년에는 58.4%로 급증하여 한국의 대표적 주거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주거양식의 급격한 변화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아파트가 처음부터 쉽게 건설된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다. 정부는 해방과 한국전쟁 후 주택부족 해소를 위해 아파트 건설을 수차례 계획하였지만, 1957년 종암아파트, 1959년 개명아파트를 거쳐 1962년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마포아파트가 건립되면서(염재선, 1970) 비로소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또한 종암아파트 건립 이후에 아파트가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어서 입주자 모집조차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정부는 주택부족 해소를 위해 지속적으로 아파트 건설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70년대 들어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아파트가 도입되어 정착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암아파트 건립을 전후로 하여 그 이전부터 전개되어온 정부의 주택공급정책과 그 이후 주택시장이 보여준 아파트에 대한 반응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국의 아파트 공급에 관한 주택정책 관련 연구는 경제개발에 따른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정책적으로 아파트 건설을 적극 지원한 1960년대 이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악화된 주택부족문제를 해결하려했던 초기 주택공급정책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또한 시장수요 측면에서 아파트 정주문화의 정착에 관한 연구는 아파트가 급속하게 확산된 1970년대 이후를 대상으로 이루어져, 그 이전에 아파트가 어떻게 국민에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물론 한국의 아파트 역사에 관한 학계의 논의는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는 박철수(2009)에 의해 종합적으로 검토된 바 있듯이 기본적으로 건축적 차원에서 근대적 건축양식, 또는 서양식 주택유형으로서의 아파트에 대한 관심에 국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논의는 실제 준공되어 물리적으로 실체를 드러낸 아파트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을 뿐, 주택정책이나 주택시장의 관점에서 그 토대를 제공한 정부의 주택공급정책과 아파트 건설 계획,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주택시장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결여되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주택부족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주택정책으로서 아파트 공급과 이에 대한 주택시장의 반응으로서 아파트 수요라는 두 측면을 순차적으로 고려해, 한국에 아파트가 보급되게 된 역사적 연원을 해방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주택공급정책 관점에서 아파트가 지니는 의미는 주택의 수직적 집적화1)를 통해 단위 토지면적당 주택공급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있다. 특히 수직적 집적은 주택이 수평적으로만 연접되는 경우에 비해 토지이용효율을 더욱 제고할 수 있는 형태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아파트’를 법적 정의에 구애받지 않고2) 수직적으로 세대가 분리되어 집적된 다층 또는 적층형 주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폭넓게 해석하도록 한다. 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1960년대에 이르는 동안 아파트에 대한 다양한 정의 및 명칭 부여와 궤를 같이한다. 또한 이에 따라 아파트에 대한 주택시장의 반응도 수직적 집적화에 따라 발생하는 고층 거주의 시장 수용성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구체적으로 공급 측면에서는 해방 후부터 1957년 한국의 첫 아파트로 일컬어지는 종암아파트가 건립되기까지 정부의 주택공급정책 형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한다. 그리고 수요 측면에서는 이렇게 공급된 아파트의 고층 거주양식이 이후 주택시장에서 수용되어 나가는 과정을 종암아파트 건립부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의 층별 가격 변화를 통해 분석한다. 연구방법은 관련 논문, 정부 간행물, 일간지를 중심으로 한 문헌조사이다. 그러나 정부문서는 한국전쟁 중 소실된 자료로 인해 자료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주로 일간지상 보도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고, 필요한 경우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원 자료를 함께 검토하였다. 아파트 층별 가격 역시 주로 일간지상의 아파트 분양 및 임대 공고 자료에 기초하였다.
이후 제Ⅱ장에서 선행연구의 특징을 검토하고, 제Ⅲ장에서 해방과 한국전쟁 후 주택부족문제를 고찰한다. 제Ⅳ장에서는 정부의 주택공급정책과 아파트 건설 계획 및 사업을 주택의 수직적 집적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제Ⅴ장에서는 아파트의 층별 가격 변화를 통해 고층 거주양식이 주택시장에서 수용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로부터 도출된 결론과 시사점은 제Ⅵ장에서 정리한다.
Ⅱ. 선행연구
한국에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용어와 건물이 도입된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알려져 있다. 심우갑 외(2002)에 의하면 당시 아파트는 서구의 “다층 집합주거”로서 근대적 도시생활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한국에 소개되었다는 의의는 있었지만, 아파트의 건립주체나 거주자 측면에서 주로 일본인을 위한 주거였기 때문에 한국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순영‧윤인석(2002)은 1930년대 이후 아파트의 개념을 “단층이 아닌 여러 층이 수직적으로 포개져 있는 적층 형태의 건물유형”으로서 각자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적층형 건물, 주인집에 예속되지 않은 계약자에 의한 임대방식, 추상적 외관으로 그 특징을 요약한 바 있다.
박철수(2009)는 해방 전‧후를 대표하는 7개의 아파트를 대상으로 하여 1957년 준공된 종암아파트가 한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 주도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점에서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아파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는데, 한 해 전 미국 자본과 기술에 의해 시범적 성격으로 건립된 행촌아파트도 최초라는 수식어에 버금가는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외에 공동주택연구회(1999), 장림종‧박진희(2009) 등도 한국의 아파트 변천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개별 건축물로서 아파트라는 주택유형에 대한 건축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으로, 실제 건축되어 물리적으로 구현된 아파트만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어 주택부족 해소를 위한 수단으로서 아파트가 지니는 주택정책적 의미는 부각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아파트를 주택정책 맥락에서 조명한 연구들은 주로 1957년 종암아파트를 기점으로, 1962년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마포아파트가 준공되면서 정부의 정책적 지원 하에 아파트 건립이 적극 추진된 1960년대 이후 시기를 다루고 있다(장성수, 1994; 김아람, 2013 등). 따라서 해방 후부터 종암아파트 건립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의 주택정책과 아파트 관련 계획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술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바가 충분하지 않다. 미군정의 주택 1만호 건설계획, 1953년 전재민주택 5개년계획, 1955년 100만호 주택건축계획과 한미재단에 의한 행촌아파트, ICA 주택사업 등이 임서환(2002)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고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한국에 아파트 보급이 본격화된 시기는 반포아파트 단지 등이 건설된 1970년대로, 특히 1973~1979년의 기간은 “고도성장과 아파트 붐”의 시기로 불리기도 한다(공동주택연구회, 1999). 그런데 이렇게 한국에 아파트 수요가 확산되기까지는 그 이전에 한국의 전통적 주거에 비해 수직적 집적화 방식의 아파트가 지니는 특성인 고층 거주에 대한 거부감이 해소되었어야 하는데, 고층 거주를 통해 아파트가 주택시장에서 수용되게 된 초기 과정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다. 다만 일반론적 차원에서 아파트 정주문화가 정착, 확산된 요인으로 장성수(1994)와 임서환(2002)은 신중간층(중간 소득의 지식인 계층) 성장이라는 수요자 특성, 그리고 천현숙(2003)은 투자 효율성과 생활편리성이라는 아파트 특성에 각각 주목한 바 있다.
Ⅲ. 해방과 한국전쟁 후 주택부족문제
1. 해방과 인구 유입
해방 후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주택문제는 해방 후 대규모 인구 유입으로 주택수요는 크게 증가한 반면, 주택재고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크게 소실됨으로써 수급이 극심하게 불균형을 이룰 수밖에 없었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해방과 뒤이은 분단은 일본, 만주, 중국 등지에서 귀환하는 동포, 이북으로부터 월남하는 주민 등 인구의 대규모 사회적 이동을 촉발시켰다. 당시 유입인구는 약 200∼25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되는데(임서환, 2002), 이에 따라 해방 전‧후 1944년 5월부터 1946년 8월까지 38도 이남 인구는 1,589∼1,657만 명에서 1,937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3)
특히 유입인구는 상당 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1944~1946년간 서울의 인구는 82.6만 명에서 114.2만 명으로 32%, 또는 1944~1947년간 90.1만 명에서 136.1만 명으로 약 51% 증가하면서,4) 제1회 총인구조사가 이루어진 1949년에는 144.6만 명까지 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5) 이에 따라 표 1에 정리되어 있듯이 1944년 이미 31.5%에 달하였던 서울의 주택부족률(=1-주택보급률)은 1946년 44.0%, 1948년 53.1%까지 급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입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무일푼의 전재민6)이 선택할 수 있었던 거처는 적산가옥7)이나 판잣집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적산가옥은 경쟁이 치열해 입주하더라도 공동점유를 감내해야 했고, 판잣집은 미군이 쓰고 버린 목재조각, 깡통 등을 이용해 만든 매우 열악한 수준이었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3).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 후까지 이어진 열악한 주거환경에 대해서는 전남일 외(2007), 김묘정(2007) 등에 묘사되어 있다.
2. 한국전쟁과 주택 소실
한국전쟁은 주택재고 감소를 초래해 주택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한 주택재고는 약 1/5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임서환, 2002), 서울은 그 피해가 더욱 컸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쟁 중 서울의 주택은 48,543동이 파손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는 바(김원권, 1996), 이는 표 1의 1950년 4월 서울시 주택재고 대비 1/4을 넘는 규모이다. 다른 자료도 전쟁 이전 서울시 주택수를 191,260호, 전란 중 파괴된 주택수를 55,082동으로 기록하고 있어8) 주택재고의 1/3 가량이 소실된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전란 중에는 소실된 주택보다 더 많은 전재민이 발생하였기에 서울의 주택부족률은 일시적으로 낮아졌다. 그렇지만 휴전 이후 전재민이 귀환하고, 추가적으로 1.4 후퇴 시 월남한 북한 주민까지 유입되어 서울의 주택부족률은 다시 30%를 넘어섰다. 이후 1950년대에 걸쳐 서울의 주택부족률은 줄곧 36∼39% 수준을 기록하였다.
Ⅳ. 주택공급정책과 아파트 건설
1. 미군정 시기: 1945~1948년
해방 후 미군정 시기(1945.9.8.~1948.8.15.)의 주택공급정책은 적산가옥을 활용한 전재민 구호가 주종을 이루는 소극적인 수준이었으며, 이마저도 불법 점유, 배분과정에서의 비리, 무계획적 불하 등으로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했다. 물론 1946년 ‘주택 1만호 건설계획’9)과 ‘3만호 신축계획’10) 등이 연달아 발표되었지만, 이는 계획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 미군정 기간에 일정 성과를 거둔 주택정책은 가주택(假住宅) 건설이었으나, 계획 대비 실적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11) 도시로 유입된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농촌이주사업의 성격도 가져12) 서울의 주택난 완화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아파트의 도입과 관련하여 오히려 흥미로운 기록은 1947년 9월 용산구 한강로3가에 지어진 용산 제3아파트이다. 이 건물은 총 31실을 갖춘 2층 주택에 불과했지만(조선건축기술협회, 1948),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할 때 해방 후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명칭이 붙은 주택으로 추정된다. 평면도를 보면 중복도 형식으로 1층은 12개의 실과 미팅룸, 그리고 명확하지는 않으나 공동화장실로 추정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총 19개의 실로만 구성되어 있다(그림 1).
그런데 이러한 평면 구성은 1941년 일제가 수립했던 대구부영주택건립계획 상의 아파트와 유사하다(그림 2). 두 아파트의 평면은 모두 공용화장실, 식당 등의 부대시설을 포함하는 2층 중복도형으로, 독신자를 대상으로 한 일제강점기 아파트의 특징을 갖고 있다(심우갑 외, 2002). 따라서 용산 제3아파트는 시공주와 설계자가 운수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제의 영향이 남아있던 채로 건설된 운수부 공무원 숙소로 추정된다.
2.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까지: 1948~1953년
정부수립 후 1948년 11월, 사회부에 주택국이 신설되어 종전에 대한주택영단, 주택행정처, 미군건설청 등으로 분산되어 있던 주택 관련 업무를 통합하였다. 주택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첫 주택공급정책으로 전재민주택 5만호 건설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미군 병사(兵舍) 등의 전재민 주택 전환, 적산가옥 재분배, 서울시내 무료숙박소 건립이 주요 내용이었다.13) 미군 병사는 임시숙소의 형태로 전환되었으며,14) 무료숙박소와 함께 동절기 동사자 방지를 위한 긴급구호 조치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적산가옥 불하는 1949년 불하 권한과 가격설정 권한이 대한주택영단으로 이관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불하를 통한 수입금 일부를 기금으로 하여 주택건설을 추진하려던 계획이 있었는데(대한주택공사, 1979), 이는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체계적인 적산가옥 불하를 통해 주택부족문제에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정부의 첫 주택공급정책은 긴급구호를 위한 임시방편적인 것이었고, 공급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1949년 6월말 기준 서울시내에 공급된 전재민 주택은 228동으로 불과 1,008세대만이 혜택을 보았고,15) 이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136세대가 추가되었을 뿐이다.16)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택건설에 나서게 된 것은 한국전쟁 발발로 막대한 물량의 주택이 파손되면서부터이다. 1951~1953년 동안 정부는 전재민 수용소, 월동용 간이주택 등 총 82,658호의 주택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동 기간에 건설된 총 주택 수의 40%에 가까운 물량이었다(임서환, 2002). 그러나 이 역시 긴급구호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해 주거환경의 질은 극히 열악했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주택부족 해소 방안으로 아파트 건립이 주택공급계획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1949년 9월 6일자 언론보도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공급에 관한 기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회부에서 주택난 완화책으로 총 1,000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집단주택, 즉 아파트를 서울에 건축할 계획을 수립 중이며, 아파트는 동당 30세대씩 수용하고 공동취사식, 계단식, 복도식의 세 유형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내용이다(그림 3).17) 그렇지만 이후 더 진전된 내용은 없어 아파트를 통해 주택부족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를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1950년 1월에는 전재민주택 1만호 건설계획이 수립되는데, 그 중에는 서울 등지에 아파트를 “도합 8개를 지어 600세대를 수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8) 이는 보다 구체화된 아파트 건립계획이라 할 수 있으나, 총 계획물량 중 불과 6%만이 아파트에 할당되어 그 비중이 매우 작다. 따라서 이 계획에서 아파트는 정책당국자가 인지하고 있던 주택유형의 하나로서 단순 포함된 수준으로 판단된다.
또한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2월 서울시는 수도 재건을 위한 도시계획 수립을 추진했는데, 이 계획안에는 도시주택문제 해결과 도시미화를 위해 다량의 아파트를 건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19) 서울이 재수복된 후 1951년 9월에는 전재민주택 5개년계획을 통해 파괴·소실된 주택을 60만호 이상 완전 복구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여기에도 아파트 150동의 건설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20)
이상의 아파트 건설계획은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주택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아파트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주택정책적 차원에서 한국 아파트 공급의 맹아(萌芽)는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발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 당시 아파트는 주택유형의 하나로 인식되었을 뿐, 수직적 집적화를 통해 토지효율성을 적극적으로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식은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전쟁 이후: 1953~1957년
한국전쟁 이후 정부는 원조자금 등을 통해 주택부족문제 해소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1953년 9월 사회부는 유엔 한국재건단(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의 원조로 5,500호의 일반후생주택 건설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동년 12월부터 9평 규모의 재건주택이 공급되기 시작했다(대한주택공사, 1979). 또한 이듬해 4월에는 주택금융을 담당하는 산업은행이 설립되어 자금융자를 통해 대한주택영단과 지방자치단체의 주택건설을 보조했다(임서환, 2002). 이에 따라 이 시기 건립된 공공주택은 재원에 따라 재건주택, 부흥주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면서,21) 전후 주택건설 물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아파트 관련 계획도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본격적으로 수립되기 시작했다. 문화아파트 건립계획이 그 효시로,22) 1953년 8월 11일자 언론보도에는 전후 심화된 주택부족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원조물자를 통해 서울시내 9개소에 문화아파트를 건립하여 집값을 떨어뜨리겠다는 서울시 관계 당국자의 발언이 소개되고 있다.23)
1954년에는 그동안 공급되었던 건평 9평 정도의 단층주택에서 벗어나 한 동에 수 세대가 살 수 있는 2층 주택을 약 15평 규모로 공급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었다.24) 이에 따라 정부가 건설한 주택 중 처음으로 층별 세대분리형 다층주택인 2층 부흥주택(층당 2세대, 동당 4세대)이 1955년 12월 16일 청량리(그림 4)와 신당동에 각 50동씩 준공되었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3).25) 이는 한국의 아파트 역사에 있어 1957년 건립된 종암아파트에 앞서 주택의 수직적 집적화를 구현한 최초의 사례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또한 1954년에는 봉급자용 아파트 건축계획도 발표되었는데, UNKRA의 원조를 통해 동당 6세대가 거주하는 72평 건평의 아파트 250동(서울 50동)을 월세를 받는 관영주택으로 건설하겠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26)
한편 이 시기에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미국의 민간 및 비영리 부문의 역할이다. 1953년 12월 3일 한미재단27) 이사이자 미국 부동산개발회사 Webb & Knapp의 대표였던 William Zeckendorf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수직적 도시계획을 제안하면서, 한미재단의 자금원조로 4층 조립식 콘크리트 건물을 대량 건설하면 주택부족 해소가 가능하다며 한국인 건축가와 공학자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제안에 적극 찬성하며 요청 인력을 파견하겠다”고 밝혀 한미재단과 Webb & Knapp의 제휴를 통한 주택건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28) 1954년 3월에는 Webb & Knapp의 건축가 페이29)가 내한하여 “현재의 한국식 건물구조는 많은 면적의 대지가 필요함으로 앞으로 100년 후 대지 문제의 해결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며 “조립식 3, 4층 건물을 대도시, 소도시, 농촌으로 나누어 100만호를 건축함으로써 한국의 주택을 일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 이는 지금까지 단기적 구호(救護) 차원에서 접근하던 주택부족 문제를 장기적으로 주택공급을 위한 토지부족 문제로 확장시킨 것으로, 주택의 수직적 집적에 대한 고려가 Webb & Knapp의 제안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전문가들도 재래식 주거의 위생문제, 가사의 불편함 등을 해소하기 위해 주택의 질적 개량뿐 아니라, 도시의 주택부족 해소를 위한 대량생산방식의 근대적 주택이라는 관점에서 아파트 건립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임서환, 2002).
이에 1955년 1월 한미재단과 Webb & Knapp은 15만 달러 예산으로 총 200호의 도시주택을 각 50호 단위의 조립식 아파트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31) 처음으로 조립식 주택 개념이 아파트란 주택유형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이 계획은 결실을 맺어 1955년 11월 착공되어 이듬해 8월 30일 준공된 아파트가 바로 행촌아파트이다(그림 5). 행촌아파트는 4개동 3층 규모에 48세대를 수용하고 각 호는 침실 2개와 주방, 욕실로 구성되어 있었다(대한건축학회, 1958). 또한 건설부가 수입한 PC(Precast Concrete) 부재를 사용해 최초로 조립식 공법으로 건설된 주택이었다.32) 이런 면에서 행촌아파트는 명시적으로 주택의 수직적 집적 개념을 적용한 최초의 아파트로서 “근대적 주택의 대량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체계적(임서환, 2002)”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국 민간부문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이 없었다면 건립될 수 없었기에 “한국정부에 의한 염가주택의 대량생산을 지도고무하기 위한 시험적 계획”33)으로 건설되었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에 행촌아파트는 한국의 아파트 도입에 있어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나, 한국 주택정책에 의해 주체적으로 공급된 아파트로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박철수, 2009).
이와 관련해 행촌아파트 준공 이전인 1955년 발표된 100만호 주택건축계획 역시 Webb & Knapp이 주도한 계획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1954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 시 Zeckendorf가 100만호 주택건축을 제안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회사 방문을 요청했고, 이에 대통령이 응하였다는 기록에 기초한다.34) 이 계획에는 1호형부터 8호형까지의 주택유형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 중 5호형과 6호형이 2층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연면적 160평, 200평 규모의 ‘아파트’로 명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35)
4. 행촌아파트 이후: 1957~1959년
이 시기 정부의 주택정책은 직접적인 구호주택의 건설에서 건설자금 융자에 의한 간접적 지원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의 주된 재원은 미국의 원조담당 기구인 국제협력처(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 ICA)의 원조자금으로, 자기자금 부담능력이나 융자금 상환능력이 있고 대지를 소유한 무주택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건축비를 융자하여(정해운, 1960) 건설된 주택을 ICA 주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ICA 주택사업은 결과적으로 소득 대비 과중한 상환 부담(전은덕, 1959) 등의 이유로 저소득층 주택문제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사업이 시작된 1957년부터 1960년 8월 말까지 준공주택 5,737호, 공사 중 주택 1,648호의 실적으로 최초 계획(1960년까지 12,000호 건설)에 크게 못 미쳤다(한종벽, 1960).
행촌아파트 이후 정부는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립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1957년 발표된 양동 불량지구 개량사업 계획으로, 여기에는 미국 원조기구인 경제조정관실(Office of Economic Coordinator, OEC)의 승인을 통해 주택자금을 융자 받아 159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3층 아파트를 건립해 해당지역 판잣집 주민과 대지 소유주로 하여금 입주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6) 이는 아파트가 주택부족문제의 대응방안으로서 뿐만 아니라 도시미화의 수단으로도 구체화되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불량주거지의 재개발을 위한 물리적 수단으로 아파트가 고려되었다는 것은 향후 시민아파트 건립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958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부흥주택관리요령에 의거하여 중앙산업이 건립한 종암아파트가 산업부흥국채 주택자금을 통해 대한주택영단에 인수되었다. 종암아파트는 152세대를 수용하는 5층 3개동 아파트로, 당시로서는 방 2개, 거실, 주방, 창고, 발코니, 수세식 변기, 인조석 싱크대, 침실 온돌이 설치되어 상당히 고급 아파트였다(장림종·박진희, 2009). 따라서 초기부터 한국의 아파트는 중산층 이상을 포함하여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거유형으로 도입된 특성을 갖고 있다.37) 종암아파트 역시 행촌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외국(독일회사)의 설계로 이루어졌지만, 산업부흥국채라는 한국 정부의 기금과 중앙산업이라는 한국 건설업체의 시공으로 건립되었다는 점에서38)박철수(2009)는 한국의 아파트 건설의 시발점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1959년 개명아파트도 중앙산업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건립되었다.
Ⅴ. 고층 거주의 시장 수용성
이상에서 논한 바와 같이 재정적, 기술적으로 아파트 건립에 성공한 정부는 아파트 공급을 통해 주택부족문제 해결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시장수요 측면에서 아파트라는 새로운 정주문화를 국민들이 수용할 수 있어야 했다. 실제 행촌아파트의 경우 대한주택영단이 분양에 어려움을 겪었고(대한주택공사, 1979),39) 종암아파트의 경우도 초기 입주자들이 공동생활을 어려워했다는 기록40)은 당시만 해도 아파트가 인기가 없었음을 반증한다. 따라서 이후 아파트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호전되지 않았더라면, 1970년대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아파트, 반포아파트, 잠실아파트 등으로 이어지는 아파트의 확산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수직적 집적이라는 아파트의 고유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일반 국민이 고층 거주를 받아들이게 된 경과를 종암아파트 이후 건립된 아파트들의 층별 가격 변화를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물론 고층 거주 수용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아파트 건립 정책과 홍보, 아파트 필요성을 역설한 전문가의 역할41)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한 실증적 자료 구득은 난망하다. 반면, 층별 가격에는 입주자의 층별 선호도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최고가격 층이 고층으로 변화해 갈수록 고층 거주에 적응되어 갔음을 검증할 수 있다.
1. 1층 최고가격 시기: 1957~1963년
1950년대 후반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는 모두 1층이 최고가격으로 책정되었고,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저렴한 가격구조였다. 표 2에 정리되어 있듯이 종암아파트의 경우 1960년 기준 보증금은 30만환42)으로 층별 차이가 없었으나, 월 임대료는 1층이 17,000환으로 최고가격을 보였고, 최저가격은 최고층인 5층으로 13,000환이었다. 개명아파트는 1층이 보증금 120만환, 월 임대료 18,000환으로 최고가격으로 설정되었고, 역시 최고층인 5층이 보증금 80만환, 월 임대료 12,000환으로 최저가격이었다(이건영, 1960). 이러한 가격 차이는 고층 거주에 대한 거부감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1962년 준공된 마포아파트에서는 1층과 2층이 동일하게 최고가격으로 책정되어43) 변화가 보이는 듯 했으나, 이듬해 분양 공고된 서울 시영아파트 분양가격에서는 다시 최고가격이 1층으로 환원되어44) 1층 최고가격 구조는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2. 2층 최고가격 시기: 1967년
1층 최고가격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이다. 표 3에 정리되어 있듯이 1967년 3월 대한주택공사에서 분양한 연희동아파트와 4월 분양한 동교동아파트는 2층이 최고가격(751,907원)으로 동일하게 책정된 반면, 그동안 최고가격이었던 1층이 최저가격(731,967원)으로 반전되어45) 변화가 시작되었다. 동년 하반기에 이르자 2층 최고가격, 1층 최저가격 구조가 정착되어 여타 아파트에 적용되기 시작하였는데, 10월에 분양한 4층의 홍제동아파트와 3층의 정능동아파트 모두 2층 최고가격, 1층 최저가격으로 설정되었다.46)
이러한 층별 가격 변화는 1967년 이루어진 설문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건축과에서 서울시내 11개 아파트 입주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입주자들이 생각하는 최적의 층은 2층(42.5%), 3층(38.2%), 1층(5.7%) 순이었으며 그 이상의 층은 높아질수록 꺼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7) 4층 이상의 선호도가 1층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2층 선호도가 가장 높게 나온 것은 층별 가격자료를 통해 확인한 바와 동일하다.
3. 3층 최고가격 시기: 1968년 이후
최고가격 층이 1층에서 2층으로 바뀐 지 불과 1년 만에 최고가격은 다시 3층으로 변경되었다. 표 4에 정리되어 있듯이 1968년 분양된 인왕아파트가 그 시작으로 최고가격이 3층(1,473,000원)으로 책정되었고, 최저가격은 최고층인 6층(1,399,000원)이었다. 1층은 6층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가격이었다.48) 이러한 3층 최고가격, 최고층 최저가격 구조는 이후 광명아파트49), 한강민영아파트50), 반포아파트51), 영동AID아파트52), 잠실AID아파트53) 등 대단지 아파트의 층별 가격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영동AID아파트와 잠실AID아파트의 경우 2, 3층이 동일하게 최고가격으로 책정된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아파트 단지에서 최저가격은 최고층이었고 1층이 그 다음으로 낮은 가격이었다. 따라서 1968년 형성된 3층 최고가격 구조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와는 조금 다른 층별 가격구조를 가진 아파트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1970년에 준공한 서서울아파트의 경우 3개동의 최고가격 층이 5층, 4층, 3층으로 각기 다르게 책정된 바 있다.54) 그래도 일관된 점은 1층이 최고가격의 층이 아니라는 사실로, 수직적 집적화에 따른 고층 거주의 부담은 탈피하였음을 알 수 있다.55)
Ⅵ. 결 론
본 연구는 한국의 주택부족 문제가 해방 후 대규모 인구유입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주택재고 소실로 이미 심화되었음에 주목하고, 주택공급을 위한 정책수단으로서 아파트가 보급되게 된 연원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첫 아파트로 일컬어지는 종암아파트가 건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근대적 주택유형으로서 아파트에 대한 건축적 관심의 차원을 넘어, 주택부족 해소를 위한 정책적 필요 차원에서 수직적 집적화 방식의 아파트 건설 계획과 실적이 축적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아파트 수요 측면에서도 종암아파트 이후 수직적 집적화에 따른 고층 거주양식이 주택시장에서 무난히 수용되어 나갔음을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 주요 연구결과 및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49년에 수립된 1,000세대 수용 아파트 건립계획을 시작으로, 1950년 전재민주택 1만호 건설계획, 1951년 수도 재건을 위한 도시계획과 1953년 전재민주택 5개년계획, 1954년 봉급자용 아파트 건축계획, 1955년 조립식 아파트 건설계획과 100만호 주택건축계획 등을 통해 정부의 아파트 건설 의지가 지속적으로 주택정책에 투영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 아파트 공급은 건축적 차원에서 아파트가 물리적 실체로서 구현되기 훨씬 이전에 정부수립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택정책적 차원에서 이미 그 토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한국의 아파트 역사는 이로부터 조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아파트는 저소득층부터 중산층 이상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전방위 주택공급정책 수단이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둘째, 건축적 차원에서 구현된 물리적 실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1957년 종암아파트가 건립되기 이전에 1955년 한국 정부에 의해 주택의 수직적 집적화를 이룬 부흥주택이 건설되었음에 주목하면, 한국의 아파트 공급의 역사적 연원은 더욱 확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1955년 12월 청량리와 신당동에 각 50동씩 건립된 2층 부흥주택은 정부가 건설한 최초의 층별 세대분리형 다층주택으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국의 아파트 공급에 있어 외부적 요인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건축양식이나 주택유형으로서의 아파트보다, 한국전쟁 이후 이루어진 국제기관의 원조, 특히 미국의 민간 및 비영리 부문의 재정적, 기술적 지원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947년에 준공된 용산 제3아파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아파트의 영향은 개별 숙소 등에 제한적으로만 남아있었다. 이에 비해 1955년 100만호 주택건축계획에 관여하고 행촌아파트를 건립한 한미재단과 Webb & Knapp의 역할은 특별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Webb & Knapp은 행촌아파트 건립에 기술적 지원을 한 건축회사로만 알려져 왔지만, 그 대표인 Zeckendorf가 한미재단 이사였고 이승만 대통령과 지속적 교류를 통해 한국 주택문제에 깊이 관여해 왔다는 사실이 본 연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수요의 측면에서 수직적 집적화에 따른 고층 거주양식이 한국 주택시장에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종암아파트부터 이후 건립된 아파트들을 대상으로 층별 가격 변화를 분석한 결과, 최고가격이 1층에서 2층으로 변화된 시기가 1967년, 그리고 다시 3층으로 변화된 시기가 1968년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1968년이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단지 준공, 첫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 기공(손정목, 2005) 등 정부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건설사업이 급속하게 추진되었던 시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 고층 거주양식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해소됨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를 일시에 공급해도 충분히 입주자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본 연구의 한계는 무엇보다 자료 취득의 한계에 기인한다. 종암아파트 이전 다층주택 및 아파트 건립계획의 대부분을 일간지 보도자료에 의존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는데, 관련 정부문서를 추적할 수 있었다면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향후 추가적인 사료 발굴에 따른 후속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보다 많은 아파트 층별 가격정보를 구득하지 못한 점도 연구의 한계로 남는다. 특히 4~6층의 아파트가 주종을 이루던 시기에 건립된 13층의 여의도 시범아파트 층별 가격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고층 아파트는 보다 다양한 층별 가격분포를 보였으리라 추측되기 때문이다.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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