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Planning Association
[ Article ]
Journal of Korea Planning Association - Vol. 61, No. 4, pp.21-41
ISSN: 1226-7147 (Print) 2383-9171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Aug 2026
Received 04 Jan 2026 Revised 01 Jun 2026 Accepted 03 Mar 2026
DOI: https://doi.org/10.17208/jkpa.2026.08.61.4.21

한국 지역균형발전 정책 담론의 형성 과정: 1962~1972년 국토계획 문서의 분석을 중심으로

김승정** ; 박인권***
The Formation of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Policy Discourse in South Korea: An Analysis of National Planning Documents, 1962-1972
Kim, Seung Jung** ; Park, In Kwon***
**Postdoctoral Researcher, Department of Urban Planning and Engineering, Yonsei University (First Author) peter6823@yonsei.ac.kr
***Professor, Department of Urban Planning, and Adjunct Research Fellow,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parkik@snu.ac.kr

Correspondence to: ***Professor, Department of Urban Planning, and Adjunct Research Fellow, Environmental Planning Institute, Seoul National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parkik@snu.ac.kr)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policy documents produced during the formative period of national planning in South Korea to examine how discourses on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emerged and coexisted with strategies of uneven development under the developmental state. The main findings are as follows. First, the discourses began to emerge in the early 1960s, when the agenda for comprehensive national planning gained momentum. These early discourses comprised two perspectives: one emphasizing equity between regions and the other advocating the decentralization of metropolitan functions. They were shaped by the military regime’s concern for democratic legitimacy, the international aid regime’s promotion of regional planning, and practical concerns over metropolitan congestion. Second, compared to uneven development strategies, these discourses remained in a subordinate position, resulting in delayed implementation or acceptance in limited forms. Nevertheless, the involvement of international aid agencies and the regime’s heightened sense of security reinforced the discourse. Third, the two strands of discourse were synthesized through the First Comprehensive National Physical Development Plan. Following the establishment of the Yushin regime, the discourse was elevated to a hegemonic vision with the addition of a discourse on industrial zoning of the whole country, as the regime sought to secure political legitimacy through economic growth. Overall, the findings suggest that the persistence of uneven development, which undermined social cohesion and capital accumulation, gave rise to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as a discourse of practice.

Keywords: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Uneven Development, Comprehensive National Physical Development Plan, Developmental State, Strategic-Relational State Theory

키워드:

지역균형발전, 불균등 발전, 국토종합개발계획, 발전국가, 전략관계적 국가론

Ⅰ. 서 론

1960~1970년대는 한국에서 고도성장의 도약기였다. 하지만, 공간적 차원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역 간 격차가 구조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수도권과 영남 지역의 중심성이 강화되는 가운데, 호남 및 여타 지역은 주변화되었다(서민철, 2018). 이는 지역적으로 편중된 소수의 성장거점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했던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단적으로, 1971년에 수립된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두고 1980년대의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국토이용관리의 효율화와 개발 기반의 확충 등을 기본 목표로 ··· 주로 거점개발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성에 비중을 둔 국토개발로 경제성장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하였으나 대도시의 인구집중과 지역 간 발전격차 등의 부작용이 수반되었다.”(대한민국 정부, 1982: p.6)

이러한 논평은 박정희 정권기의 국토계획이 ‘거점개발방식’이라는 불균등 발전에 입각했다는 점을 주지시키면서,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정책적 담론과 시도는 전무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1960~1970년대에 지역 간 격차를 완화하려는 정책적 논의가 없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활용되는 정책 수단 중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원형을 두고 있다.

오히려 박정희 정부 시기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내려진다. 정책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박정희 대통령부터 국토의 균형개발 및 서울·수도권의 인구 분산에 큰 관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로 여러 계획과 시책들이 추진된 점을 주목한다(손정목, 2003; 오원철, 2006; 전상인, 2019). 한편, 지역불균등 심화에 따라 정치·사회적 위기에 직면한 정권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 수동적·소극적 대응으로서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시행했다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전시(展示)적 속성을 띠거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기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손정원, 2006; 박배균, 2012). 혹은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제도적인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효성은 미흡했다고 평가하는 중립적인 논조도 확인할 수 있다(김용웅 외, 2009).

상반된 평가의 간극 속에서 합의할 만한 결론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간 국내의 국토·지역계획에 관한 계획과 정책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여 개괄하는 성과가 도시계획 학계에서 축적되어 왔지만(김용웅 외, 2009;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2019), 1차 사료에 기반해서 상세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사전적인 의도와 목적, 사후적인 실천 과정 및 결과를 총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이 같은 분석 작업의 일단으로서, 한국 국토계획 형성기의 정부 문서들을 검토하여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고 전개된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담론(discourse)은 단순히 미시적이고 기술적인 차원의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그 사회의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 규범과 제도 등의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유용한 분석 대상이 된다(Fairclough, 1995). 경제성장을 국가 운영의 최우선적 목표로 두었다고 평가되는, 이른바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시기에 박정희 정부가 분배적 성격의 균형발전 정책을 실행한 배경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발전국가를 관료제에 기반하여 계획적인 합리성을 갖춘 체제로 해석했던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자면 불균등 발전 전략과 균형발전 정책의 모호한 혼용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한 당대 균형발전 담론의 고찰은 한국의 발전국가와 균형발전 정책의 어색한 동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 정부 측의 공적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정책 담론을 둘러싼 다층적인 사회적 맥락을 온전히 재구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당시 사료적 제약과 함께, 국가가 학계, 언론, 시민사회보다 우위에서 담론 형성 과정을 주도했던 권위주의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정부 계획문서는 국가의 문제 인식과 정당화 논리가 집약된 핵심적인 공적 담론으로서 중요한 분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본 연구는 정부 문서 위주 분석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당대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상세한 고찰을 병행하여 이 공적 담론이 형성되고 변천한 과정을 추적하고자 했다.

구체적인 분석자료 목록은 <표 1>과 같다. 이는 박정희 정부 전기의 사료들로서 국토계획과 관련하여 대외적으로 공표된 정부 시책·계획과 내부 문건을 아우른다. 사료들이 작성된 기간은 1962~1971년으로서, 국토계획 수립이 정책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으로 종합되기까지의 기간이다. 또한, 계획문서는 아니지만 균형발전 담론이 헌법적 가치로 격상된 중요한 계기로서 제7차 개헌을 통해 공포된 1972년 『유신헌법』 또한 검토 대상에 포함했다(박배균, 2012).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1962~1972)가 박정희 정부 집권기 20여 년을 포괄하기에는 다소 부족할 수 있으나 지면의 한계를 고려했으며, 가장 마지막에 이루어질 『유신헌법』에 대한 분석이 정권 후기 균형발전 담론의 위상 변화를 어느 정도 시사할 것으로 판단했다.

Types of discourses on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and key documents: 1962-1972

본 연구는 사료들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1960~1970년대 균형발전론을 구성하는 논리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전국적 차원에서 권역 간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담론이고, 둘째는 도시권 차원에서 대도시의 과잉 집중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킬 것을 강조하는 담론이다. 셋째는 국토 전역이 고르게 혹은 빠짐없이 이용·개발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전 국토 산업권화’ 담론이다. 각자 배경에 따라 정립된 이 논리들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의제로 종합되었고 균형발전론을 점차 확대·강화하였다.

본문의 사료 배치와 내용적 흐름도 각 담론의 성격과 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Ⅱ장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기 국토계획과 정책을 분석하고 이를 국가론의 맥락에서 해석한 선행연구들을 검토함으로써 연구의 차별성을 설명한다. 특히 본 연구는 발전국가의 균형발전 정책을 전략관계적 국가론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연구 동향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Ⅲ장은 국토계획이 정책적 의제로 부상한 1960년대 초에 어떻게 균형발전 담론이 등장했으며, 특히 권역 간 형평성을 강조하는 담론의 초기 전개 과정을 고찰한다. 이어지는 Ⅳ장에서는 균형발전 담론의 또 다른 축인 대도시 분산론이 형성된 배경과 그 실천 과정에서 나타난 굴절과 한계를 살핀다. Ⅴ장에서는 이 양대 담론이 종합되는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과 유신체제 수립 이후 등장하는 전 국토 산업화 담론의 함의를 분석한다. 마지막 Ⅵ장에서는 연구의 결론을 제시한다.


Ⅱ. 이론 및 선행연구 검토

본 장에서는 1960~1970년대 한국에서 전개된 지역 불균등 발전 및 균형발전과 관련된 담론과 정책이 학술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검토한다. 특히, 국가론의 맥락에서 양자를 분석한 연구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우선, 박정희 정권기 지역 불균등 발전 담론 및 정책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1990년대부터 비판지리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제기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지적은 국가가 자원을 특정지역(수도권, 동남권)에 집중 배분함으로써 집적경제와 자본의 독과점적인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을 공간적으로 뒷받침한 구조였다는 평가이다(김왕배, 1991; 김덕현, 1992). 정치 문화적 관점에서 영남으로 편중된 정치·행정 엘리트 구조와 지역주의적 의사결정을 지역 불균형의 배경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김영정, 1994).

2000년대부터는 이러한 설명이 발전국가 이론의 틀 속에서 정교화되었다. 발전국가론은 20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국가 운영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전략산업에 대한 선별적 지원, 자유시장 내 과잉 경쟁 규율, 금융 및 가격 체계 통제 등 국가 주도적인 개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Johnson, 1982; Wade, 1990; Amsden, 1989).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는 연구들에 따르면, 당시 공간정책 또한 자본 축적을 위한 경제정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작동했으며, 지역 불균등 발전은 발전국가의 선별적 자원 배분 전략이 공간적으로 구현된 결과였다(윤상우, 2005; 손정원, 2006; 김동완, 2013; 박배균, 2017; Sonn and Choi, 2022). 발전국가는 효율적인 자본 축적을 위해 각종 정책적 혜택을 집중하고 수혜 자본의 자격을 제한하는 산업단지나 산업도시를 집중 조성했다. 이러한 공간들은 ‘산업화/발전의 섬’(손정원, 2006; 김동완, 2013), ‘발전주의 특구’나 ‘예외공간’(박배균, 2017)이라는 개념으로도 지칭되며, 발전국가의 공간전략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해석된다.

불균등 발전 담론과는 다른 맥락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 지역 균형발전 담론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 경향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강한 의지와 행위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설명은 특히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회고적·자전적 문헌에서 자주 등장한다. 박정희가 1970년대 수도권 분산 정책과 행정수도 이전 구상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강조되며 국토개발연구원의 설립(1978) 당시 대통령이 하사했다는 “국토의 균형개발” 휘호에 대한 일화도 거론된다(손정목, 2003; 오원철, 2006; 김의원, 2022).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국가나 사회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분석보다는 인물 중심의 설명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두 번째 해석은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체제 안정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사이자 헤게모니적인 수단이었다고 설명하는 비판적 관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1960년대를 거치며 지역 간 격차가 심화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균열과 갈등이 고조되면서, 지역주의적 정치가 대두되고 정권의 존속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유신체제 수립을 통해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균형발전이라는 추상적 선언과 보여주기식(showing off) 실천을 통해 체제를 안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김덕현, 1992; 윤상우, 2005; 손정원, 2006; 박배균, 2012). 이들 연구는 대체로 균형발전 담론의 본격적인 등장 시기를 1970년대로 간주하며, 그 이전인 1960년대에는 국가가 ‘조국 근대화’ 담론을 통해 총량적 경제성장을 강조함으로써 지역사회의 불균형적 실태를 은폐하거나 국가적 성장과 동일시하려 했다고 분석한다(김동완, 2013).

본 연구는 1960~1970년대 균형발전 담론의 전개 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기존 선행연구와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관점을 강조한다. 첫째, 발전국가의 개입을 유능한 관료 집단이 주도하는 계획 합리성(plan-rationality)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하는 전통적 발전국가론(Johnson, 1982)의 관점을 지양한다. 이러한 베버주의적(Weberian) 국가론은 이 시기 불균등 발전 전략을 단지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서 ‘발전국가의 승리’의 요인으로 평가하게 만든다(전상인, 2019). 하지만, 동시기에 모순적이게도 균형발전 담론이 공존했던 상황은 계획 합리성이라는 관점만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앞서 검토한 최근의 일부 연구들은 밥 제솝(Bob Jessop)이 주창한 전략관계적(strategic-relational) 국가론의 시각을 도입하여, 국가 권력을 다양한 사회세력 간의 관계와 역학 속에서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Jessop, 1990). 이를 통해 균형발전 담론을 불균등 발전에 따라 심화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동원된 발전국가의 헤게모니적 대응 전략으로 해석한다(손정원, 2006; 박배균, 2012). 또한, 전략관계론은 동일한 의제를 두고도 국가적 차원의 행위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 자체에 구조적인 모순과 딜레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Jessop, 2002). 본 연구도 이와 같은 관점을 수용하여 균형발전 담론이 발전국가의 유능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적 맥락과 역학관계의 변화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여기에는 발전국가의 딜레마적 상황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본문에서는 이 같은 이론적 관점을 분석틀로 동원하여 개별 사료 분석마다 적용하는 것은 사료가 가진 의미를 과도하게 도식화하고 한정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분석 결과의 전략관계론적 의미는 Ⅵ장에서 제한적으로 논의하였다.

둘째, 이 시기의 국토계획에는 불균등 발전 담론과 균형발전 담론이 분명히 혼재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균형발전론은 정치적 수사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실천적 의지가 내재해 있었다고 해석한다.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어떤 관점에서는 불균등 발전 전략의 전형으로 평가되지만(대한민국 정부, 1982), 다른 관점에서는 균형발전 담론이 정치적 수사로나마 등장했다는 논거로도 인용된다(손정원, 2006; 박배균, 2012). 이러한 이중적 해석은 단지 연구자 간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당시 국토계획의 담론에 서로 모순되는 공간 계획 논리들이 혼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대의 균형발전론을 단지 정치적 수사로만 환원하는 평가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셋째, 지역균형발전 담론의 형성 시기를 1960년대 초까지 적극 소급하여 분석한다. 여러 선행연구는 1970년대를 균형발전 담론과 정책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설정해 왔는데, 이는 공표된 계획과 법제가 논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연구는 1960년대 초부터 생산된 정부의 계획문서와 시책들을 검토함으로써 지역균형발전 담론의 기원을 보다 이른 시기로 소급하고, 균형발전 정책이 여러 쟁점 속에서 상당히 느린 속도의 궤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관점의 정당성은 Ⅲ장 이후의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질 것이다. 우선 국토계획의 추진과정에서 어떻게 권역 간 균형 담론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Ⅲ. 국토계획의 추진과 권역 간 균형 담론의 전개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토 공간 구상에 대한 논의가 정책 영역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개별 지역에 대한 ‘사업’ 단위의 개발이 추진되었으나 종합적인 ‘계획’ 수립 단계로 논의가 확대되자 국토개발의 방향성에 대한 두 가지 담론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원을 집중하는 거점개발 방식의 불균형발전론이며, 다른 하나는 권역 간 격차 해소를 지향하는 균형발전론이다. 이 중에서 발전국가의 성장 지향성과 부합했던 거점개발론이 우위를 점했지만, 민주적 당위성을 표방해야 했던 초기 군사정권의 입장에서 균형발전론도 부차적 지위지만 주요 원칙으로 자리매김했다. 지역 격차 해소를 위한 계획적 관념으로 주목받은 것은 국토 권역화 작업이었다. 전국을 수 개의 권역으로 구분하고 이들 간의 형평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미국의 원조 하에서 1960년대 후반에 착수해서 ‘4대권 8중권 17소권’이라는 결과물을 제시했고, 향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골격이 되었다. 그러나, 작업이 초기에 의도했던 지역과학의 적용이나 권역별 계획에 기반한 구체적인 전략의 도출은 1960년대 동안 미완의 단계에 있었다.

1. 국토건설사업에서 종합적 국토계획 구상으로

이승만 정부가 퇴진하고 1960년 8월에 출범한 장면(張勉) 내각은 국내 실업 해소를 위해 대대적인 일자리 공급 대책인 ‘국토건설사업’에 착수했다. 국토건설사업은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자발적 운동으로서 국토개발과 관계된 일자리를 공급하고 참여자에게는 미국 원조 농산물 등을 재원으로 노임을 지급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1961년 3월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수리, 도로, 사방, 조림 등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집권한 군부 정권은 불량배나 부랑자, 병역미필자 등을 강제 동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했고, 여기에 인권 침해 등의 폐단과 부작용이 잇따르면서 1962년 12월에 사업은 중단되었다(임송자, 2013).

국토건설사업은 정책 담론에서 ‘국토건설’ 혹은 ‘국토개발’이 전면에 등장한 계기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각 부처의 개별 사업을 단순히 모은 수준에 불과했고 각 사업들도 단발적·근시안적으로 추진된다는 비판을 받았다(박동묘, 1961: p.118; 조성근, 1963a: pp.55-56). 같은 시기에 수립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사업의 큰 방향성을 언급되기는 했지만, 이는 “균형적”이면서도 “집약적”이어야 한다는 상반된 수사가 모호하게 나열된 서술이었다(대한민국 정부, 1962: p.313; 신용옥, 2013: p.76).

이러한 맥락 속에서 국토개발에 대한 종합계획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미 경제정책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종합계획이 출범한 데다가, 국토계획 수립을 적극 주장하는 전문가 집단인 ‘대한국토계획학회(現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가 등장(1959년 창립)한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초대 학회장 주원(朱源)은 1953년 『국토계획의 이론과 운용』을 출간하고 언론·잡지 기고를 통해 해방 이후 줄곧 국토계획의 수립과 제도화를 주장해 온 인물이기도 했다.1)

1962년 11월, 국토건설사업에 대한 종합계획, 즉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정부 각 부처에 시달되었고, 건설부는 몇 차례의 시안을 거쳐 1963년 8월에 국토계획의 거시적인 방향을 지시하는 ‘대강(大綱)’을 마련했다. 「국토건설종합계획대강」이라는 명칭의 이 문건은 비록 완결된 종합계획에는 이르지는 못했지만 국토계획의 기조를 처음 설정한 문헌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 초기 균형발전론의 부차적 위상

「국토건설종합계획대강」(이하 「계획대강」)은 총 5부의 책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제1부 ‘기본구상 편’에서 국토계획의 방향성을 공식화했다. 여기서 제시된 핵심은 “전 국토상에서 가장 개발효과가 높고 또한 현실의 국가이익에 기여도가 많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요한 곳을 ‘특정지역’으로 정하여, 이를 미리 계획화함에 진력하고 그에서 창출된 새로운 개발력을 여타지역에 파급”시키는 전략, 이른바 “개발거점 선행계획에 의한 연쇄반응적 전국개발양식을 채택”한다는 것이다(건설부, 1963: p.21).

거점개발론이 채택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시간적 제약이다. 전국을 포괄하는 상세한 계획을 수립하기에는 자료조사 상태가 미흡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데에도 장기간이 소요되므로, 중요 지역에 대해 국지적인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확정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건설부, 1963: pp.20-21). 둘째는 기존 국토건설사업의 한계였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었던 조성근(趙性瑾)은 정부 공보물인 『최고회의보』의 기고문에서 다수의 소규모 건설사업을 각지에 분산시키는 방식은 일시적 일자리 창출에 불과한 민심 위안의 미봉책으로, 실질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조성근, 1963a;: p.58 1963b: p.64; 신용옥, 2013: p.78에서 재인용), 그리고 군사정부는 집권 이후 전국에 분산된 건설사업들을 신속히 완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했다(조성근, 1963b: pp.59-61). 이처럼 거점개발론은 규모의 경제와 집적경제의 논리에 기반하여 확립된 것이었다. 「계획대강」은 거점개발론에 따라서 태백산, 서울·인천, 아산만, 영산강 일대를 ‘특정지역’으로 설정했으며, 이 문서의 제2~5부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구체적 구상을 수록했다.

「계획대강」이 단지 거점개발론만을 기조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국토를 여러 권역으로 구분하고 권역 간 균형발전을 도모한다는 목표 역시 제시했다. 문건에 따르면, 하천 유역을 기준으로 전국을 5개 권역(중부, 호서, 호남, 영남, 관동)으로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중부권의 기능적 우위성이 월등히 강화”되고 있음을 고려해서 호서권과 관동권을 중부권에 통합하여 3대 광역권(중부, 호남, 영남) 체계를 최종 확정했다(건설부, 1963: p.25). 나아가, 각 권역을 지리적 조건과 기능에 맞게 분화 및 특화하여 “전국 권역이 전반에 긍(亘)한 균형적 향상 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건설부, 1963: pp.21-22). 최상위 공간계획인 ‘전국계획’에서도 “각급 권역들이 폭주와 낙후없이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건설부, 1963: p.47). 하지만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균형발전의 목표는 거점개발에 비해 ‘부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거점개발 방식을 성장 전략으로 채택하면서 균형발전론까지 굳이 거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64년 2월 건설부가 작성한 「국토건설종합계획 수립현황 보고」라는 문건에서 그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정으로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국토계획 방침을 설명하는데, 역시 「계획대강」과 마찬가지로 거점개발론과 3개 광역권 구분, 지역별 특화에 따른 산업·인구 배분, 그리고 권역 간 균형발전을 목표로 밝히고 있다(건설부, 1964a: p.24). 흥미로운 점은, 국가의 정치 체제와 경제 수준에 따라 국토계획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인식한 대목이다. 서술에 따르면 국토계획은 ‘독재형’과 ‘민주형’으로 구분되는데, 전전(戰前) 일본이나 소련 등의 ‘독재주의 국가’는 통치자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하향식 계획을 추진하는 반면, ‘민주 우방국’에서는 민주복지 향상과 민주적 절차에 기반해 계획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도 ‘선진국가’들은 공업 분산이나 도시 조정 등 산업과 지역 간 균형발전을 지향하는 ‘조정형’ 계획을 우선시하지만, ‘신흥 저소득국가’는 ‘개발형’ 계획을 채택한다고 설명했다(건설부, 1964a: pp.9-10). 이는 균형발전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가 지향해야 할 국토계획의 목표임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은 신흥 저소득국가에 해당하므로 성장 중심의 개발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는 정부의 논리를 담은 것이었다. 국토계획의 민주적 가치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군부 태생 정권의 초기 상황을 반영한 논리이기도 했다.

「계획대강」이 표방한 두 국토발전 담론의 위상 차이는 실제 실천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거점개발 방식의 수단으로 제시된 ‘특정지역’은 「계획대강」이 표방한 대로 ‘특정지역’은 실제로 지정되었다. 1963년 서울·인천 특정지역이 처음 지정된 것을 시작으로, 1966년 울산과 제주도, 1967년 태백산, 영산강, 서산·아산 일대가 잇달아 지정되었다. 반면, 권역 간 균형론은 정책적인 조치가 뒤따르지 못했을뿐더러, 담론 자체도 추상적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3. 국토 권역화 작업과 균형 담론의 강화

권역 간 균형 담론이 구체성을 띠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그 계기는 1966년 7월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이었다. 이 계획은 미국 원조기구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의 지원을 받아서 산업연관분석을 활용한 부문별 계획을 작성했고, 이전 계획보다 큰 방법론적 진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역적 고려가 부재했기 때문에 차후에는 경제개발계획과 국토개발계획을 연계 수립해야 한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경제기획원, 1967: p.160). 두 계획을 연계시킬 수 있는 방법론으로 채택된 것은 산업연관분석을 공간적 차원으로 확대하는 지역 산업연관분석이었다. 작업의 한 축을 맡게 된 건설부는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수에도 불구하고 지역 간의 격차가 이율배반적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지역구조의 분석과 지역의 균형적 발전계획 수립에 유익한 자료를 제공하는 지역연관분석법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건설부, 1968b: p.5).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의 작업이 요구되었다. 첫째는 전국을 동질적인 성격을 지닌 수 개의 권역으로 구분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권역 간 경제활동의 투입·산출 자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전국적 차원에서 설정된 총량적 계획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권역별로 지역계획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제기획원은 제3차 경제개발계획의 기본전략 구상에 착수하면서 권역별 지역계획 개념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2) USOM도 동일한 목표를 상정하면서 미국 국가계획협회(National Planning Association, NPA) 소속의 마셜 우드(Marshall K. Wood)를 초빙했다.3) 계획조직 차원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USOM은 경제기획원뿐만 아니라 UNDP와도 협력해서 ‘지역계획 작업단(regional planning work-group)’을 구성함으로써 지역 투입산출표(regional input-output table)와 이에 근거한 계획모형 작성을 추진했다(건설부, 1968b: pp.6-7). USOM과 경제기획원이 UNDP와도 협력 관계를 구성해야 해던 이유는 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에서는 USOM과 경제기획원이 공조 관계에 있었지만, 국토개발계획 작업은 UNDP와 건설부의 협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4)

1967년 말, 첫 번째 단계 작업의 성과물로서 ‘2대권 7중권 17소권’으로 구성된 국토 권역안이 모습을 드러냈다.5) 우선 전국을 서울대권과 부산대권으로 나누고, 서울대권은 4개 중권(수도, 태백, 대전, 전주권), 부산대권은 3개 중권(대구, 부산, 광주)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중권 아래에는 17개의 소권을 두는 안이었다(건설부, 1967: pp.13-17). <그림 1>의 왼쪽 지도와 같이, 권역 중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위계는 지역 산업연관분석의 단위이기도 한 대권과 중권이었으며, 정부는 이들 권역별로 경제기구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을 언급하기도 했다.6)

Figure 1.

Changes in the concept of the planning region classificationSource: Ministry of Construction (1967: p.13; 1968a: p.34),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71: p.115)Note: In the drawing of the initial concept (1967), the boundary of the Sub-Region (소권) is omitted.

17개 권역 구상은 1968년 12월에 건설부가 공표한 「국토계획기본구상」(이하 「기본구상」)의 기초가 되었다. 「기본구상」은 <그림 1>의 가운데 지도와 같이 ‘4대권 8중권 17소권’을 제시했는데, 이는 전년도의 초기 구상에서 조금 변형된 형태였다. 기존의 서울대권과 부산대권은 각각 ‘중부 경제권’과 ‘남부 경제권’으로 지칭하되 공식적인 권역 구분에는 포함하지 않았고, 수계를 중심으로 4개 대권(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유역권)으로 구분했다. 중권은 기존 7개 권역 중에서 광주권으로부터 제주권을 분리하여 8개를 제시하고, 가장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을 강구할 수 있는 계획권역으로 간주했다. 소권도 기존 권역들의 일부 명칭과 중심도시를 조정했다(건설부, 1968a: pp.32-34).

「기본구상」은 앞으로 10년 단위로 수립될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기본강령이자 20년 뒤의 국토상의 목표를 제시하는 일종의 ‘헌장’ 성격의 문서였다(건설부, 1968a: p.8).7) 이 구상에서는 균형발전에 대한 의식이 크게 돋보인다. 국토를 집약적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겠다는 방침을 이야기하면서도, 종전 「국토건설종합계획대강」처럼 거점개발 방식의 불균등 발전 기조는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사회간접자본을 적정하게 배분하여 지역적인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국토계획의 궁극적 목표라고 강조했다(건설부, 1968a: pp.23-24).

국가적 경제 발전 단계와 지역균형발전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본구상」은 「계획대강」과 차이를 보였다. 「기본구상」도 전(前) 공업경제나 과도기 단계에 있을 때는 자원 개발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이 중요하고, (고도) 공업경제 단계에 들어서면 대도시권뿐 아니라 부진한 지역을 개발해서 국토의 공간 질서를 재정비·조정하는 것이 과제라고 설명했다는 점에서 「계획대강」과 유사한 일반론을 제시한다. 다만, 한국은 모든 시책이 동시적으로 필요한 실정이기 때문에 두 단계의 국토계획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건설부, 1968a: pp.53-54).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균형발전의 위상을 성장 담론만큼 격상시킨 것이었다. 「기본구상」은 균형발전의 당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 지역 격차의 실태 또한 상세히 다루었다. 공업구조상으로 중공업 비율이 전국 평균을 상회하는 곳은 서울·경기와 부산·경남 지역뿐이었으며, 면적 대비 소득과 교통망(도로·철도)의 비율도 서울과 부산 지역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을 지적했다(건설부, 1968a: pp.37-39).

이렇게 지역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맥락 속에서 「기본구상」이 제시한 국토개발권역 구상은 지역별 시설 투자 규모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이해되었다(건설부, 1968a: p.31). 그러나 「기본구상」은 헌장 성격의 문서였던 만큼 권역 구상을 토대로 국토 균형을 위한 실천 전략을 구체적으로 내세우지 못했다. 공업입지는 집적 이익을 초과하지 않도록 분산시키고 기간산업은 권역 단위로 적정 배분하며, 지역산업을 권역별 특성에 따라 분업·육성시켜 지역의 자립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원론 이상의 대책은 부재했다(건설부, 1968a: pp.87-90). 권역별 계획 인구(1986년) 설정에서도 균형발전의 의지가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기본구상」은 기준연도(1966년)와 비교했을 때 여러 중권 중에서 수도권(23.9%→28.1%)과 부산권(15.8%→18.4%)만이 인구 비중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시인구 비율도 수도권(84.0%)과 부산권(74.0%)만이 전국 평균(64.0%)을 상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건설부, 1968a: pp.35-37). 국토 불균형 추세의 억제를 기대하는 목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국토개발권역 구분의 동기가 되었던 지역연관분석이 계획에 적용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경제개발계획 추진에 따라 국토불균등이 심화되면서 국토계획을 통해 지역 간 형평성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확연해졌다. 이는 국토 권역화 구상을 매개로 강화되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실천적인 전략으로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특히, 지역과학(regional science)의 적용과 권역별 계획에 기반한 균형발전 전략의 확립 여부는 결국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Ⅳ. 대도시 분산 담론의 전개

지역균형발전 담론의 또 다른 축으로서 대도시 분산론도 1960년대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對)아시아 국제 원조체제에서 대도시 분산 지향적인 지역계획론이 권장되었다는 점,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인구 급증이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대도시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 중소도시와 농촌 지역의 낙후뿐만 아니라, 성장에 있어서도 규모의 불경제를 야기한다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발전주의 정책 기조 속에서 대도시 위주의 개발을 중단하고 규제하는 조치들은 대체로 곧장 실천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그중에서 가장 빠르게 시행에 들어간 ‘공업 분산 정책’은 지역주의적 요구에 힘입어서 지방 주요 도시에 공업단지를 안배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으나, 대도시 소재의 공장들을 분산 이전시킨다는 방침은 관철되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고조된 안보적 위기감은 대도시 분산론을 한층 강화하는 변곡점이었다. 무엇보다도 3대 대도시 중에서 수도이자 국경과 가장 가까운 서울, 더 나아가 수도권을 가장 중요한 분산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분산을 위한 구체적인 규제 또는 유인책들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실제 계획과 정책에서는 수도권보다는 기존 분산론이 다루었던 3대(혹은 2대) 대도시가 실제 규제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한편, 이 시기의 분산론은 대도시 문제의 원인을 영세민들의 유입으로 진단하고 이들의 역외 이주를 해법으로 여기는 배제적 한계를 드러냈다.

1. 대도시 분산론의 형성과 광역도시계획

대도시 분산론의 등장은 1960년대 초 지역계획의 수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ECAFE(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아시아·극동 경제위원회)로 대표되는 국제 원조체제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CAFE는 1947년 UN 산하에 설립된 국제기구로서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적절한 경제개발 정책을 입안·실행할 수 있도록 조사와 연구, 권고를 담당했다. 특히, 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상황에서 가입국들이 경험을 교환하고 새로운 이론을 습득하는 장으로 기능했다(박태균, 2003). 경제개발계획뿐만 아니라 지역계획(regional planning)도 국제 세미나 등을 통해 ECAFE의 주요 정책 의제로 다뤄졌고, 관련 논의는 번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8)

한국에서 지역계획은 ‘광역도시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도입되었는데, 광역도시계획 또한 1962년 1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ECAFE 도시관계회의에서 그 필요성을 논의하고 착수된 것이었다.9) 광역도시계획의 도입은 국내에서도 반향을 불러왔다. 주원은 일본의 국토·지역계획론의 영향을 받아서 1950년대에 이미 자신의 저서 『도시계획과 지역계획』(1955년)에서 서울 주위의 위성도시 배치 구상을 제시한 바 있었다(김혜영·이상헌, 2023: pp.45-49). 그는 광역도시계획의 도입을 두고, 국토계획을 추진하기에는 제도와 여건이 불비한 시기였기에 도시계획을 광역 규모로 확대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김경린(金暻麟) 등 건설부 관료들도 이에 동의하여 광역도시계획을 적극 주도했다고 회고했다(주원, 1997: p.320).

1962년 12월, 건설부는 「광역도시계획수립」을 작성하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이 문서가 제시한 광역도시계획의 목적은 ① 과대도시 방지, ② 입지조건에 따른 적정한 도시 배치, ③ 산업개발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효율적 설치, ④ 토지이용도 증진, ⑤ 지역별 격차 시정이었다(건설부, 1962). 이 가운데 ‘과대도시 방지’와 ‘지역별 격차 시정’이 균형발전과 직접 연관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지역별 격차’가 어떤 공간적 차원의 불균형을 의미하는지 문구상으로 명확하지가 않은데, 동 문서에 첨부된 ‘광역도시계획조사지침’이 그 의미를 보완하고 있다. 지침에 따르면 광역도시계획의 개별 단위는 중핵도시를 중심으로 위성도시, 외곽도시 등이 결합한 것이다. 또한 “도시 상호 간의 건전한 발전과 유대를 도모하고, 인접한 농촌 및 개재(介在)된 평야와 산악 등을 총망라하여 종합적인 자원개발과 인구 및 이윤의 균등분배”를 지향한다(건설부, 1962: p.1). 기존 도시계획보다 확대된 스케일로서, 도시와 농촌 및 주변 지역의 관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계획인 것이다(주원, 1997: pp.320-322). 다시 말해, ‘지역별 격차 시정’이라는 목표는 「국토건설종합계획대강」이 강조한 권역 간 균형보다는 도시권 내부에서 도시 간, 도시-농촌 간 격차를 완화하는 것을 지칭했다. 그리고 대도시의 과잉 성장을 억제하고 분산시키는 것이 균형을 달성하는 핵심 과제로 간주되었다. 이는 에베네저 하워드(Ebenezer Howard)와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des)를 거치며 확립된 대도시 분산 지향적인 초기 지역계획론의 이상(Hall, 1988)과 부합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광역도시계획수립」은 원론에서 그치지 않고 주요 대도시(서울, 대구, 대전, 부산, 광주시)와 영주읍을 중심으로 반경 70~100km 내에서 주변 도시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5개 권역을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다음 해인 1963년부터는 수도권을 시작으로 광역도시계획 수립을 위한 실무가 시작되었고, 1964년 수도권 광역도시계획 구상에 대한 보고서가 처음으로 작성되었다. 이후 1968년까지 호남권·영남권 등 다른 권역에 대해서도 조사 및 계획 보고서들이 생산되었다. 비록 이들 계획은 1960년대 후반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수립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공식 계획으로서의 효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대도시 분산론이 공간정책의 영역에서 당위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평가할 수 있다.

2. 대도시 억제 시책의 구체화

대도시 혼잡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사회적으로도 점차 확산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수도 서울의 인구 증가는 괄목할 만했다. 서울시 인구는 1956년(150만 4천 명)에서 1962년(298만 3천 명)까지 6년간 무려 2배나 증가했으며, 결국 1963년에는 행정구역을 2배 이상 확장(268.35km2→613.04km2)하였다(서울특별시, 1966: pp.12-13).

교통은 서울 시민들이 일상에서 혼잡을 체감했던 대표적인 부문이었다. 승용차 중심의 교통 정책이 확고하지 았았던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속의 시내 노면전차가 대표적인 도시 교통수단이었으며, 이는 서울시 교통난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큰 비판을 받고 있었다. 1964년, 윤치영(尹致暎) 서울시장,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안경모(安京模) 교통부 장관이 몸소 통근시간에 나서서 겪었다는 일일 ‘교통지옥’ 체험기는 세간에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최인영, 2016: pp.229-230). 서울시의 주택 공급 속도 역시 인구의 증가 추세를 따르지 못하고 영세민의 불량주택지는 계속 증가하면서 주택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1966년 기준, 서울시 내 상주 세대는 약 67만 7천 호에 달하는 한편, 주택 수는 약 34만 6천 호에 불과했기 때문에 불과 51.0%의 세대만이 주택수요를 충족하고 있었다(서울특별시, 1966: p.283).

이 때문에 윤치영 시장은 농촌 인구의 서울 집중을 극히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활발한 도시계획사업이 인구 유입을 자극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국내 첫 대도시 억제 시책인 「대도시인구집중방지책」이 작성된 배경에는 그의 언행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전한다. 손정목에 따르면, 1964년 2월에 개최된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윤치영 시장은 서울의 인구집중을 문제시하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해 올 사람은 각 도지사의 사전허가를 받고 ··· 다시 서울시장의 허가를 받는, 그런 입법 조치”라도 필요하다고 발언했고 이것이 대통령의 의중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손정목, 1969: p.10; 2003: pp.181-182).

1964년 9월 국무회의를 통해 의결된 「대도시인구집중방지책」(이하 「방지책」)은 과도한 대도시 집중이 “경제발전과정에 있어 큰 장해”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계획의 취지라고 설명했다(건설부, 1964b: p.1). 앞선 「광역도시계획수립」에서는 ‘과대도시 방지’와 ‘지역별 격차 시정’의 취지를 함께 거론했다면, 「방지책」에서는 경제성장의 측면에서 규모의 불경제를 경계한 것이다.

「방지책」은 대도시에 집중된 기능을 규제하고 이를 농촌 및 타 지역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대책들을 열거한다. 대도시와 업무 관련성이 낮은 관공서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고, 학교와 산업·교통·문화시설 등도 대도시보다는 신산업도시와 농촌에 유치시키는 취지의 조치들이다(건설부, 1964b: pp.3-6). 광역도시계획도 신산업도시 배치와 기존 도시 재개발에 대한 구상을 확립함으로써 대도시 과대화를 방지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강조되었다(건설부, 1964b: pp.16). 흥미로운 점은 대도시로부터 분산되어야 할 사람에 대한 계층적 인식이다. 「방지책」은 영세민들이 대도시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영세민 구호 대책으로서 세제를 경감해주고 있었는데, 이것이 영세민들로 하여금 대도시로 이주하게 만드는 유인이므로 농촌과 균등하게 과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건설부, 1964b: p.14). 대신, 구호대책을 신산업도시와 농촌에 집중하고 농토 개간을 적극 지원해서 도시 영세민들을 정착하게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건설부, 1964b: pp.18·24·27). 이러한 입장은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경계했던 윤치영 서울시장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며, 대도시 과대 집중을 경제성장의 차원에서 해롭다고 여겼던 「방지책」의 경제주의적 관점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지책」은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따르지 않아 실효성을 갖지 못했다(김용웅 외, 2009: p.423; 대한 국토·도시계획학회, 2019: p.207). 윤치영 시정을 뒤이은 김현옥(金玄玉) 시정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것처럼 더욱 적극적인 개발 행정을 추진했기 때문에 대도시 억제 시책은 실효성을 갖기 어려웠다.10) 다만 「방지책」에서 다루어진 각종 분산적 조치들은 향후 추진되는 지역균형발전 정책들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박세훈 외, 2021: p.60).

3. 공업 분산 정책의 추진과 한계

「방지책」의 여러 제안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 가능성이 검토되었던 것은 공업 분산 정책이었다. 1965년 7월, 대통령 비서실은 공장들을 지방에 계획적으로 분산시킬 정책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같은 해 12월에 건설부에서는 「공업분산및입지정책」을 성안했다(건설부, 1965: pp.39-40).

「공업분산및입지정책」(이하 「입지정책」)은 국내 공업이 3대 대도시(서울, 부산, 대구)에 지나치게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핵심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전국의 공업생산액 중에서 3개 대도시가 차지하는 비중만 해도 무려 59%에 이르렀기 때문이다(건설부, 1965: p.11). 「입지정책」은 대도시에 공업이 집중함으로써 도시 내 공해가 증가하고 무계획이 난립하여 생산의 비능률성과 성장 저해가 초래되는 한편, 농어촌 등의 지방은 소외와 침체를 겪고 그나마 입지한 공업도 기반시설 공유와 같은 집적경제 측면에서 생산비 절감 효과를 누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생산거점이 소수인 것도 원료 수송비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이라고 진단했다(건설부, 1965: p.3). 대도시 분산론의 당위를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관점과 낙후지역을 배려하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고루 언급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서 「입지정책」은 ① 공업생산의 경제성 증대, ② 전국적 공업 진흥의 자극 유발, ③ 도시공해 저하와 복지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④ 지방적 산업기능의 균형화, ⑤ 지방 경제·문화의 향상을 공업 분산 정책의 목표로 제시했다(건설부, 1965: p.4). 정량적으로는 대도시에 입지하는 공장(6,223개) 중 일부는 지방으로 이전(876개)시키고 지방에서도 공장을 신설(2,780개)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목표를 달성한다면 전국의 공장 수는 14,860개에서 18,516개로 증가하여 총 공업 생산량은 더 늘어나면서도 대도시 공업생산액의 비중은 59%에서 31%까지 축소될 것이었다(건설부, 1965: pp.11-14).

1966년 1월, 정부는 건설부의 「입지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며 그다음 해부터 사업을 실행하기로 했다.11) 그러나 사업의 근거법 입안을 논의하는 과정은 대도시 분산 담론과 실천 간의 괴리를 드러냈다. 건설부가 『공업입지법(안)』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 법안의 골자는 일종의 특구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지방에는 공장의 유입을 장려하기 위해 ‘공업유치지구’를 지정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에는 공장의 신·증설을 제한하는 ‘공업제한지구’와 기존 공장까지도 이전시킬 수 있도록 ‘공업정리지구’를 지정하자는 것이다.12) 하지만 성안 단계까지 이르렀던 법안은 돌연 전면 폐기되었다. 대도시 내에 입지하고 있는 기존 공장을 규제하는 것은 지나친 ‘폐단’이라고 결론 지어졌기 때문이다. 대도시 성장 억제에 대한 경제적 부담과 사유재산권 규제 강도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대도시 공업은 『공해방지법』을 통해 공해 예방·방지 수준에서만 관리하고, 지방 적지에 공업 단지 조성을 적극 유치하는 유인책 중심의 법제를 마련하기로 했다.13) 유인책 중심의 지원법은 1970년 1월이 되어서야 『지방공업 개발법』이라는 명칭으로 제정되었고, 혜택을 제공하는 ‘지방공업 개발장려지구’의 첫 지정을 통해 법률의 실제 효력이 발휘된 시점은 1973년이었다. 지방공업에 대한 유인 규정을 둘러싸고도 난항을 거듭했던 결과였다.

법제 정비는 더디게 이루어졌지만 지방 각지에서는 공업단지들이 이미 조성되기 시작했다. 「입지정책」만 해도 ‘개별 공장’ 단위의 입지 분산 계획이었으나, 공장들을 집적시킨 ‘공업단지’가 확고한 공업 입지 정책의 단위로 부상했다. 공업단지의 밀도로는 도별로 1개씩 공업단지를 안배하는 ‘1도 1단지’의 방침이 확립되었다.14) 이에 따라 광주, 전주, 춘천, 대전, 청주 등 내륙에 입지한 도청 소재지급의 지역 중심도시에 경공업을 주요 업종으로 하는 일련의 지방 공업단지들이 1960년대 후반부터 ‘붐’처럼 조성되기 시작했다(유영휘, 1998: pp.46-50). 여기에는 비단 정부의 방침뿐만 아니라, 자기 지역에 공업을 적극 유치하려고 나섰던 지역주의적 움직임이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김동완, 2009; 박배균·최영진, 2014; 최영진, 2014; 황진태·박배균, 2014).

이상과 같이, 초기 대도시 분산론의 산물로서 지방 공업단지 정책이 출범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라는 발전국가의 의제와 상충하면서, 대도시의 기능을 직접 규제하고 외부로 이전시킨다는 담론의 핵심 방침은 1960년대 말까지 힘을 얻지 못했다.

4. 안보 위기에 따른 담론 강화

1968년 1월,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상당한 충격으로서 박정희 정권으로 하여금 비상사태 대비훈련(을지연습) 도입,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번호 발급 등 일련의 대응 조치들을 신속하게 취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대도시 분산 담론에 안보적 요인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4월, 제2회 을지연습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수도권 방위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수도의 인구집중을 통제하는 법률 제정을 고려해 보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일련의 작업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15) 같은 해 9월에 무임소장관실에서 수립한 「우리나라의 인구조절에 관한 대책」이 그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임소장관 김윤기(金允基)의 명의로 작성된 이 문건은 본래 인구정책 전반에 관한 계획으로서 가족계획 등 인구를 억제하기 위한 방침이 그 핵심이지만, 대도시 분산책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16)

「우리나라의 인구조절에 관한 대책」 (이하 「조절대책」 )도 이전 계획들과 비슷하게, 대도시 인구 집중은 시가지의 무질서한 팽창, 교통 혼잡, 범죄 증가, 주택 및 상하수도의 부족 등 일련의 혼잡비용을 유발한다고 폐단을 지적한다(김윤기, 1969: pp.344-345). 분산의 대상으로서 3대 대도시가 거론된다는 점도 기존의 분산론과 동일하다(김윤기, 1969: pp.331-335). 다만, 눈여겨 볼 점은 도시화에 의한 인구 이동 대부분이 서울로 집중되고 있음을 강조하고(김윤기, 1969: p.253), 여기에 국방의 논리를 더해서 서울, 더 나아가 수도권을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분산 대상으로 부각한다는 것이다. 「조절대책」은 인구 과밀지역은 적의 공격 대상이므로 대도시 자체가 국방상 불리하다고 말하면서 특히 서울을 강조했다. 서울은 휴전선과 가까우면서도 중추 기관과 산업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경우 심대한 타격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었다(김윤기, 1969: pp.159-160). 따라서, 수도권은 정부 차원에서 계획기구를 구성해서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상시 관리할 지역으로 간주되었다(김윤기, 1969: pp.460-461).

한편, 1964년 「대도시인구집중방지책」에서 드러났던 영세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기서 더 전면적으로 다루어졌다. 「조절대책」은 대도시 영세민의 증가에 따른 ‘폐단’으로 도시 재정의 궁핍을 손꼽았다(김윤기, 1969: p.345). 더 나아가, 한국에서 대도시 집중 문제의 핵심은 인구수 자체가 과잉이어서가 아니라, 유입되는 인구가 모두 영세민과 이농민으로서 구호 대상적 인구인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도 없으면서 대도시에서는 과세도 불가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사회문제와 재정을 악화시킨다는 것이다(김윤기, 1969: pp.347-349). 특히, 서울시의 경우 여러 개발 행정으로 만성적인 재정 부족을 겪고 있었기에, 과세원이 되지 않는 영세민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광주대단지 건설을 통해 무허가 정착지의 영세민들을 시외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추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조절대책」이 제시한 대책은 대체로 「방지책」의 연장선에 있었다. 대도시의 도심지에는 공장·대학·시장 등 각종 시설의 신·증설을 제한하거나 부담을 지우고, 부도심이나 교외·외곽지대에 개발을 유도하고 신산업·위성도시를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대도시 내 입지 필요성이 작은 정부 시설들은 재배치를 통해 이전하기로 했다(김윤기, 1969: pp.362-375). 하지만 공장 같은 민간 부문 생산시설의 경우, 앞선 공업 입지 정책에서 폐기되었듯이, 강제적인 이전 방침을 채택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공해방지법』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에 저촉되는 공장만큼은 자발 이전하도록 간접적인 압력을 가한다거나, 생산시설이 지방에 소재하면서도 본사는 대도시에 있는 업체에 대해 본사를 공장 현지로 이전시키는 안을 덧붙였다(김윤기, 1969: pp.364-366). 대도시 영세민에 대해서는 면세를 비롯한 일체의 특혜를 축소하고 구호사업도 외곽지와 중소도시에 집중시킬 것을 권장했다(김윤기, 1969: pp.369-371). 하지만 수도권은 상설 관리가 필요한 대도시권으로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은 후속 계획의 몫으로 남겼다(김윤기, 1969: p.461). 실제로 1969년 12월에는 청와대 산하 ‘수도권인구억제대책위원회’는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방안」을 성안했으며, 다음 해 3월에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대통령 직속 ‘수도권문제심의위원회’에서 「수도권 인구의 과밀집중 억제에 관한 기본지침」을 작성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도시 분산론에서 거론되는 구체적인 전략들이 비로소 현실화하였다. 1971년 1월에 『도시계획법』을 통해서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막는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과 도시 내 과잉 집중 유발시설의 설치를 제한하는 ‘특정시설제한구역’이 도입되었고, 같은 시기에 『공해방지법』도 개정되면서 오염물질을 기준 이하로 개선하지 않는 공장에는 이전을 명령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1972년부터는 서울 소재 공공기관과 국영기업체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시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조세 수단도 활용되었다. 1971년 12월에는 일련의 세법 개정(등록세, 법인세, 소득세)을 통해서 대도시에 이전해 오거나 신설되는 업체에는 중과세하는 한편, 대도시 밖으로 이전하는 업체에는 세액 공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유신체제 수립 이후에는 『지방세법』을 개정(1973년 3월)하면서 취득세·재산세·주민세에 대해서도 대도시 입지 혹은 거주 여부에 따라 중과세 및 세제 혜택을 적용하게 했다. 특히, 이때 신설된 주민세는 애초부터 대도시 인구 집중을 억제한다는 목적으로 수도권인구억제대책위원회의(1969년)와 서울시(1973년)의 제안을 거쳐 도입된 것이었다.17) 그리고 취지에 맞게, 인구가 적은 지역(100만 명 이상의 시, 50만 명 이상의 시, 기타 시, 군 순)일수록 낮은 표준세율의 균등할(均等割)을 부과했다.

다만, 정책 담론과 실천 간에는 약간의 괴리도 있었다. 대표적인 지점은 분산 대상의 지리적 범위였다. 제1의 분산 대상으로 형상화되었던 ‘수도권’은 막상 실제 정책에서는 적용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이는 수도권의 명확한 계획적 범위와 성격 자체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절대책」은 서울 중심으로 교통거리가 1시간 미만으로서 인천, 의정부, 수원 등에 이르는 영역을 수도권으로 전제했다(김윤기, 1969:460). 그러나 <그림 1>과 같이, 국토 권역화 작업에서 설정된 수도권은 서울시와 경기·인천 전역(계획에 따라 강원도 철원군 포함)을 아우르는 영역이었다. 사실 후자의 수도권은 단일한 과밀·규제 권역으로 간주하기엔 너무나 광범위했기 때문에, 오늘날 ‘수도권정비계획’처럼 하위권역으로 구분하여 계획을 달리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권역에 대한 합의가 미흡한 상황에서 수도권은 분산 정책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기 까다로웠고, 결국 기존의 분산론이 호명했던 ‘3대(혹은 2대) 대도시’가 실제 규제의 권역으로 간주되었다. 앞서 살펴본 1971년 12월 세법 개정 당시, 중과세와 조세 혜택 여부를 구분하는 ‘대도시’는 서울시와 부산시를 의미했다.18) 1973년 3월 『지방세법』 개정 사례의 경우에는 서울, 부산뿐만 아니라 대구시까지를 ‘대도시’로 규정했다.19)

대도시 영세민에 대한 특혜 축소 담론도 실제 정책에서는 제한된 강도로 반영되었는데, 신설 세제인 주민세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주민세 균등할의 경우, 소득 재분배 측면에서 생계보호대상자를 비롯한 일정 소득 이하의 저소득층을 비과세 대상으로 설정했는데 그들이 주민세 시행 이후 대도시로 전입해 오면 면세 혜택을 취소하게 한 것이다.20) 「조절대책」 담론 상의 강경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도시의 기존 영세민들까지 적용하지 못했던 원인은 그만큼 정부에 정치적 부담감이 작용한 결과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시가 광주대단지 건설을 통해 영세민을 시외로 이주시키는 방침뿐만 아니라, ‘시민아파트’로 대표되는 도심 정착 시책을 병행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1960년대 말에 안보적 위기를 겪으면서 대도시 분산 담론은 크게 강화되었고 본격적인 정책화 단계에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안보는 정권과 체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도권 전역을 규제한다거나 영세민들을 대도시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등의 강경 담론은 실제 정책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나 축소된 형태로 반영되었다.


Ⅴ. 지역균형발전 담론의 종합과 헤게모니적 도구화

장기 종합적 국토계획의 수립이 정책 과제로 등장한 지 10여 년 만에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1971년)이 수립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개별 계획을 통해 개진되었던 양대 균형발전론의 구성 논리들이 일거에 제시되며 종합되는 계기였고, 일부 방침은 국제 원조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낙후권역 개발사업 추진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국토종합계획에 지역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균형발전론이 성장 담론으로서의 불균등 발전론과 혼재되면서 계획의 지향점도 선명해지지 못했다. 균형발전론 내적으로도 권역 간 균형 담론과 대도시 분산론이 논리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지역불균등 심화에 따른 지역적 불만이 1971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치적 결과로 반영되자,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체제 수립을 통해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지역균형발전 담론이 헌법적 가치로 격상되었다. 그와 함께 국토의 모든 토지는 빠짐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전 국토 산업권화’라는 이전과 다른 차원의 균형발전론을 제시했다. 이는 지역 격차에 따른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한 정권의 유화책인 동시에, 경제성장으로부터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총동원적 생산 담론의 일환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 균형발전 담론은 유신체제의 취약한 정당성을 극복하고 사회적인 동의와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명 ‘헤게모니적 비전(hegemonic vision)’(Jessop, 1990)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1.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수립과 균형발전 담론의 종합

1968년 2월, 정부는 공식적인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해 UNDP에 지역계획 수립에 관한 공식 원조를 신청했고, 1970년 3월에 협약이 체결되면서 2년간(1970~1971년)의 원조가 시작되었다(박세훈 외, 2021: p.97). Ⅲ장에서 전술한 것처럼, 경제기획원과 USOM은 경제개발계획, 건설부와 UNDP는 국토개발계획을 담당하여 양자를 연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균형발전을 목표로 하는 두 계획의 연계는 지역과학의 방법론을 적용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USOM은 지역 간 산업연관분석을 수행하기 위해서 한국경제개발협회(KDA)와 한기춘 연세대학교 교수 등에게 용역을 발주했고,21) 이들은 USOM과 경제기획원의 17개 권역안을 토대로 모형 구축을 시도했다(건설부 주택·도시 및 지역계획 연구실, 1968: p.252). 또한, USOM과 UNDP가 공조하여 구성한 ‘지역계획 작업단’은 KDA와 한기춘 연구진의 용역 결과와 곧 정비될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1970년까지 지역 산업연관모형을 작성함으로써 제3차 경제개발계획과 제1차 국토개발계획의 수립에 활용할 계획이었다(건설부, 1968b: pp.6-7).

결과적으로 두 계획의 지역과학적 연계는 실패했다. KDA의 지역 산업연관모형은 중간보고에서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건설부, 1968a: p.6), KDA 스스로도 분석을 위한 통계자료들이 부족하다는 점을 자인했다(이주영, 2015: p.29). 권역 간 생산 물자 이동에 대한 통계가 충분치 않아 지역 산업연관표를 온전하게 구성할 수 없었으므로, 권역별 계획 목표는 모형의 본래 계산 방식을 따를 수 없었고 자의적인 기준과 수치의 대입이 시도되었다(이주영, 2015: pp.30-32).22) 뒷날,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권역별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취지였으나 지역별 기초자료가 불충분해서 권역별 개발 방향만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면서 그 사정을 암시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112). 같은 시기에 수립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안정화 정책의 일환으로 통화량 공급 방정식만 계량모형에 추가했을 뿐, 결국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답습하는 방식으로 수립되었다(전철환, 1977: pp.128-129).

그러나, 균형발전담론은 여전히 국토계획 원조사업에서 중요한 축이었다. UNDP 측에서 사업에 참여한 프랑스 용역회사 ‘오탐 메트라 인터내셔널(Otam Metra International)’은 국민총생산 성장, 물가 안정 등 거시경제적 목표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한국의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계획을 제안하는 것이 자신들의 핵심 목표라고 공언했다(Otam Metra International, 1972: Ⅲ; 박세훈 외, 2021: pp.99-101). 또한, USOM과의 협업을 통해 성안되어 1968년 「국토계획기본구상」에서 채택된 17개 국토권역 구상도 여전히 유효하여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권역별 계획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서 1971년 10월, 정부는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하 「1차 국토계획」)을 공표했다. 「1차 국토계획」은 머리말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내세웠다.

“특히 이 계획에서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대도시의 인구 및 공업 분산과 지방 중소도시의 육성 및 기간(基幹)적 사회간접자본시설의 체계 있는 정비를 통한 국민경제 능률의 극대화와 지역적 자립의 조성을 유도함으로써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xiv)

부진한 지역과 사회·문화적으로 뒤처진 농어촌을 개발하기 위해 지역의 자립 기능을 강화한다는 것도 계획의 주요 기조로 채택되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9). 지역 간 균형과 대도시 분산에 관한 담론들을 아우른 것이었다. 균형발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구와 산업의 과도한 집중은 “다른 지역의 발전을 저해”하고 “과밀로 인한 공해 등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폐해가 있으며 “국방적 견지”에서도 분산의 필요성이 검토된다고 지적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118),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의제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한편, 1963년 「계획대강」에서 등장했지만 1968년 「기본구상」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불균등 발전 전략도 다시 전면에 드러났다. 「1차 국토계획」은 계획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거점개발방식’을 주요 수단으로 설정할 것이며, 경제성이 큰 대규모 사업을 우선 실행해서 그 효과를 전국에 상호 연쇄적으로 파급시키겠다고 공언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9).

상반된 두 담론의 혼재 속에서 「1차 국토계획」은 어떻게 실천 전략을 구체화했을까. 불균등 발전 전략의 경우, ‘대규모 공업기지’가 국민총생산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거점개발의 선도적 수단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9). 대규모 공업기지의 입지는 두 군데가 제시되었다. 첫째는 동남해안의 ‘중화학공업 벨트’이고, 둘째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만 임해공업지역이다. 동남해안 중화학공업 벨트는 포항, 울산, 마산, 삼천포, 여수 등의 공업도시들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계획은 이 일대의 공업생산 비중을 목표연도(1981년)까지 전국의 1/3 수준(33.0%)으로 향상시킨다고 목표를 설정했다. 경기만 임해공업지역은 인천에서 아산만에 이르는 일대에서 인천, 수원, 평택 등을 중심지로 설정한 지역인데, 목표연도까지 전국 공업생산액의 약 15.6%를 담당시키고자 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p.28-29). 두 지역의 목표를 더하면 전국 공업생산액의 약 절반(48.6%)을 차지하게 되는데, <그림 2> 왼쪽의 공업 입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면적에 비해 공업 비중이 상당히 높게 책정된 것이다.

Figure 2.

The Concept of the industrial location (left) and the Seoul Metropolitan Area readjustment (right) in 「The 1st Comprehensive National Physical Development Plan」Sourc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71: pp.27·123)

균형발전 전략에서 근간이 되었던 것은 역시 권역별 계획과 대도시 분산 대책이었다. 특히 국토이용의 불균형을 시정하는데 적절하다고 간주된 권역의 단위는 전국을 8개로 구분하는 ‘중권’이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10). 그중에서 3대 대도시가 속한 권역을 제외하고, 5개 중권의 중심도시(광주, 대전, 전주, 강릉, 제주) 기능을 강화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간주했다. 이 5개 도시에는 계획기간 연평균 인구 증가율을 5~10% 범위에서 책정했지만, 3대 대도시(서울 1.2%, 부산 2.6%, 대구 3.1%)에는 가장 낮은 수준의 증가율을 설정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p.71-74). 공업 입지 계획도 3대 대도시의 전국 대비 공업생산액 비중을 57.4%에서 20.3%로 감축시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대도시 공업 비중을 31%로 계획했던 1965년 「공업분산및입지정책」에 비하면 더 과감해진 것이었다. 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방공업개발법』을 활용한 조장책을 통해 입지 제약이 적은 업종을 지방에 강력 유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전, 청주, 광주 등 주요 도시지역에 도시의 수요 및 정보·기술과의 접근성이 중요한 도시형 공업을 유치할 것을 주문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p.29-31). 이리하여 <그림 2> 왼쪽과 같이, 핵심 성장거점인 남동해안 공업 벨트가 돋보이는 가운데, 주요 임해·내륙도시에 공업을 분산시킨 입지 구상이 갖추어졌다.

대도시 분산을 위한 공간구조 차원의 방침들도 소개되었다. 대도시 주변에 위성도시를 개발해서 인구를 분산시키고 부도심을 육성해서 단핵도시를 다핵도시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동시기 『도시계획법』에서 도입했던 규제적 수단(특정시설제한구역, 개발제한구역 등)을 적용하고 대도시별 광역도시계획을 세우기로 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74).

그렇지만, 균형발전 전략의 두 도구인 권역별 계획과 대도시 분산론이 원활한 논리로 통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8개 권역 중에서 핵심적인 분산 대상으로 지목된 수도권 구상을 살펴보자(대한민국 정부, 1971: pp.117-120). 「1차 국토계획」의 수도권 계획은 전국 대비 수도권의 공업생산액 비율을 45.2%에서 29.9%로 낮춘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하는 정책 과제들은 실상 수도권 밖으로의 기능 분산보다는 수도권 내에서 서울의 기능을 분산하는 방침들이 핵심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서울 일대에는 전국적·국제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중추관리기능만을 집적시키고 향후에 필요한 중추관리기능은 한강 이남 지역 등 부도심에 분담케 하며, 서울에 입지할 필요가 없는 관공서와 국영기업은 다른 연고지로 분산하게 했다. 생산(농업·공업), 유통 및 교육·연구 기능도 수도권 내 각 지역에 분산 배치할 것을 명시했다. 특히 공업 기능은 서울~인천, 서울~수원, 인천~수원 축선에 배치하고, 서울 광화문 반경 10km이내에는 부적격 공업을 적극 이전시킬 것을 계획했다. 서울시 내에는 공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도시형 공업 외에는 건설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 반경 15km 권역 일대에는 개발제한구역을 설정하고, 반경 30km 밖의 지역에는 10개의 위성도시 개발을 촉진해서 공업을 분산시킨다는 것이 구상의 요지였다(<그림 2>의 오른쪽). 따라서, 서울시의 인구 비중은 축소(1970년 17.6% → 1981년 17.0%)되더라도, 수도권의 비중은 오히려 소폭 증가(1970년 28.4% → 1981년 28.9%)할 것으로 예상되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p.71·114).

부산권과 대구권에서는 반대의 양상이 나타났다. 부산과 대구는 대도시로서 분산 대상이었지만, 권역별 계획은 이들을 권역의 중심도시로서 개발·육성해야 할 공업지로 명시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p.127-128). 특히, 부산권(2.0%)은 계획기간 동안 전국(1.5%)에서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을 권역으로 예상되었다(대한민국 정부, 1971: p.114).

광주, 전주, 충청권의 경우에는 계획의 1차 시안에서 ‘식량 공급’이 권역의 핵심 기능으로 설정되는 일이 있었다. 광주권과 전주권은 공업이 배제된 것에 대해 반발을 제기했고 최종 계획에서는 ‘농업·공업’이 세 권역의 주 기능으로 확정되었다(이주영, 2015: pp.38-40). 지역의 상향식 요구가 제기되지 않았다면 권역별 계획의 균형발전 취지는 더 미약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수도권을 제외한 7개 권역별 계획은 각 1장 정도의 빈약한 분량으로 작성되어서 「1차 국토계획」에서 국토 권역 구상에 부여된 역할은 그 상징성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위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차 국토계획」의 권역별 계획이 갖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데, 이를 토대로 몇몇 권역에서 국제기구 원조에 의한 지역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낙후된 권역으로 평가된 광주권에 대한 개발계획이 UNDP의 제2차 지원사업으로 추진되었고(박세훈, 2021: pp.96-97), 차후에는 태백권, 전주권에 대한 개발계획도 수립되었다. 이중 광주권과 전주권에서는 실제로 수년에 걸친 개발사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유신체제 성립과 균형발전론의 헤게모니적 도구화

「1차 국토계획」의 수립을 거쳐 종합된 균형발전 담론은 유신체제의 수립을 거치며 더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게 된다. 국토종합계획이 수립되기 약 6개월 전에 치러졌던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지역불균등의 심화가 정권의 정치적 위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역 격차에 따른 호남 소외론과 반(反)독재 구호를 주창한 야당(신민당)을 여당(민주공화당)이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것이다. 선거 결과는 영·호남 대립 구도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정치의 등장을 의미했다(Park, 2003).

정치적 균열과 위기를 통제하기 위해,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발령하고 유신체제를 수립하여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이와 더불어서, 국토계획 담론의 측면에서 나타난 변화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의제를 헌법적 가치로 인정한 것이었다. 1972년 12월에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제8호』(이하 『유신헌법』)에 “국토와 자원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그 균형 있는 개발과 이용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는 조항(제117조 2항)과 “국가는 ··· 농어촌개발을 위하여 계획을 수립하며, 지역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기한다”는 조항(제120조 제1항)”이 새로 삽입된 것이다. 불균등 발전에 따른 정치·사회적 균열과 위기를 무마하는 정권의 헤게모니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박배균, 2012).

여기서, 『유신헌법』의 균형발전 조항이 의도한 또 하나의 헤게모니적 전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토와 자원의 “균형 있는 개발과 이용” 혹은 “농어촌개발”과 같은 언설이 수출 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총동원적 생산 담론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유신체제는 권위주의를 강화한 것에 대한 가장 큰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 성장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당시, 정권은 “100억 달러 수출”이라는 목표를 표명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에 대한 평가가 이 목표의 달성 여부에 달려 있으며 국민들의 사고방식과 모든 정책의 초점을 이 목표에 맞추어 총력 집중해야 한다고 여겼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의 입안자인 오원철(吳源哲)은 이를 발언하는 대통령의 어조가 꼭 ‘국가 총동원령’과 같았다고 회고했다(오원철, 2006: p.153).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에서 지배집단이 경제성장을 위해 이런 총동원적 노력을 기울였던 까닭은, 이것이 곧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Castells, 1992).

10월 유신 이후 “전(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총동원적 생산을 외치는 각종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00억 달러 수출 목표의 주무 부서인 상공부는 ‘전산업·전상품 수출화’를 구호로 내세웠고,23) 대통령은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 “유신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과학기술을 익혀 산업에 이바지하는 ‘전 국민 과학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오원철, 2006: pp.206-211). 이후로는 ‘전 국민의 참여화’, ‘전 자원의 동원화’, ‘전상품의 우위화’, ‘전 부락의 공장화’, ‘전 지원의 국제화’ 등 다양한 수출 구호들이 쏟아졌다.24)

이 중, 국토계획의 맥락에서 제창된 구호는 ‘전 국토 산업권화’였다(그림 3). 그 계기는 1972년 11월 영산강댐 건설 예정지를 방문한 대통령이 “우리의 모든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균형 있게 개발해서 전 국토를 산업권화”하자고 발화한 것이었다.25) 며칠 뒤에는 장예준(張禮準) 건설부 장관이 「전 국토 산업권화를 위한 5대 전략목표」를 발표했다. 5대 전략목표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에 따르면 ‘전 국토 산업권화’란 한정된 국토를 “한 치의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값있게 쓸 수 있”도록 국토의 균형개발을 촉진한다는 것을 뜻했고, 이를 위해 국토를 생산 기능 중심의 권역들로 개편하겠다고 강조했다. 더불어서, 건설부 장관은 ‘전 국토 산업권화’ 방침이 발의 단계에 있었던 『유신헌법』의 국토 균형개발 조항과도 합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6)

Figure 3.

The slogan of ‘Industrial Zoning of the Whole Country’ reported by 「Daehan News」Source: 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1972.11.11.; 1972.11.18.)

‘전 국토 산업권화’ 담론은 권역 간 격차나 대도시 집중의 폐해를 지적하기보다, 국토의 모든 토지를 빠짐없이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른 차원의 균형발전론이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놀리지 않”고 생산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생산 입지가 더 촘촘하게 배치되어야 했고, 이는 <그림 3>과 같이, 농가를 공장화하고 농촌은 공업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건설부의 발표로부터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은 ‘전 국토 산업권화’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마을 공장’ 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그보다 앞서 농촌 주거환경 개선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던 ‘새마을 운동’에서 명칭을 따온 것인데, 산업구조의 측면에서 농촌에서의 공산품 개발과 생산을 지원하여 농가의 부업소득을 증대시키고 유휴인력은 해소함으로써 도시-농촌 격차 해소와 농공병진을 도모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새마을 공장 사업은 시범지역부터 추진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전농촌 공업화’라는 구호 하에 전국 ‘1면 1공장’을 표방했다.27) 그러나, 공업이 입지하기에는 불리한 농촌에 면당 1개 공장 수준으로 자원을 분산시키는 것은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기 어렵게 하는 조건이었다. 난항을 겪던 새마을 공장은 훗날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1983년)에 따라 일정 규모의 공장들을 집단화시키는 방식의 ‘농공지구 (現 농공단지)’로 개편된다.

1970년대 중·후반으로 가면서 균형발전 정책의 기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서울을 넘어서 수도권 자체가 규제·분산의 단위로서 인식론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어 이른바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이 추진되었고 행정수도 이전 구상도 수립되었다. 그리고, 헤게모니적 비전으로서 당위성을 획득한 균형발전 담론은 이들 정책의 강력한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VI. 결 론

본 연구는 우리나라 국토계획 형성기의 정책 문서들을 검토함으로써 지역균형발전 정책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고 전개된 과정을 고찰했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위해 불균등 발전 전략을 펼쳤던 발전주의 시기에 균형발전 담론이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했다.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균형발전 담론은 이미 1960년대 초에 장기 종합적인 국토계획 수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등장했으며, 권역 간 격차 해소를 강조하는 관점과 대도시의 집중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주요 담론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민주적 당위성을 의식하면서 형평성을 어느 정도 표방해야 했던 초기 군사정권의 입장이나 개발도상국에 대도시 분산적인 지역계획 도입을 권장했던 국제 원조체제(ECAFE), 대도시 인구 급증 및 혼잡에 대한 현실적 우려 등이 담론의 형성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둘째, 균형발전 담론은 성장 지향적인 불균등 발전 전략에 비해 부차적인 지위에 머무르면서 그 실천이 지연되거나 제한된 차원에서 수용되었다. 우선, 권역 간 형평성 담론은 지역과학 이론을 적용해서 경제개발계획과 국토개발계획을 연계 수립하려는 미국 원조체제의 관여 아래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국토 권역화 작업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그 성과물로 탄생한 ‘4대권 8중권 17소권’ 구상은 이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골격이 되기도 했으나 지역과학 이론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도시 분산론의 경우, 집적경제의 효율성 논리와 상충하면서 1960년대에는 대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 없이 지방 공업단지를 지역별로 안배하는 정책에 그쳤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정권이 안보적 위기감을 겪으면서 1970년대부터 실질적인 대도시 분산 정책이 도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도권을 중점 분산 대상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대두했으나, 수도권 권역에 대한 정책적 합의가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1970년대 전반에는 3대 대도시가 실질적인 규제 범위로 설정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담론은 대도시 혼잡의 원인을 영세민들의 유입으로 진단하고 이들의 역외 이주를 해법으로 제시하는 배제적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셋째, 1970년대에 들어서 균형발전론의 두 담론은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종합되었으며, 유신체제 수립 이후에는 전국토 산업화 담론까지 더해지면서 균형발전론은 헌법적 가치이자 정권의 헤게모니적 비전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은 성장 전략으로서 거점개발 방식을 내세웠으므로 계획의 지향점이 분명하지 못했고, 균형발전론 내적으로도 정합성이 충분치 못했다. 수도권에 대해서는 대도시 분산론이 권역간 균형론의 취지를 제약했고, 부산권·대구권에서는 후자가 전자의 논리를 제한하는 모양새였는데, 계획은 그 근거와 취지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다. 한편, 유신체제는 지역 격차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는 유화적 담론이자 권위주의 강화의 정당성을 가져다주는 총동원적 생산 담론으로서 전 국토 산업화 담론을 적극 활용했고, 이는 새마을 공장,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 행정수도 이전 등 1970년대 중·후반 균형발전 정책 추진의 근거가 되었다.

발전주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국토계획에서 균형발전 담론이 자리 잡게 된 배경에 대해, Ⅱ장에서 언급한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론의 관점을 빌린다면 <그림 4>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구조적으로 모순과 딜레마를 내재하며, 만약 이를 둘러싸고 일방의 전략만이 지속적으로 선택된다면 문제적 국면이 초래된다고 설명한다.28) 일례로, 국가가 마치 ‘이상적인 총자본가(ideal collective capitalist)’처럼 정책이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에만 방점을 둔다면 사회적 차원의 응집성(social cohesion)은 저해될 우려가 크다는 점을 들 수 있다(Jessop, 2002: pp.18-22). 마찬가지로, 발전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채택한 불균등 발전 전략을 일방적으로 지속할 경우, 지역 간 격차의 심화와 대도시 정주 환경의 악화 등으로 인해 사회적 응집성이 저하될 수 있었다. 분단국가의 맥락에서는 안보적 위기감까지 야기했다. 불균등 발전 전략이 자본 축적에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않다는 점도 딜레마였다. 과도한 공간적 집적은 규모의 불경제를 낳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과잉 집중은 분산시키고 여타 지역의 자원을 남김없이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성장에 유리하다는 논리도 이 시기 균형발전 담론의 확립에 기여했다. 이와 같은 해석은, 균형발전정책을 개인(대통령)의 의지적 산물로 해석하거나, 계획 합리적으로 순탄하게 추진되어 온 것으로 평가하는 전통적 발전국가론의 관점, 발전국가의 정치적/기만적 수사에 그치는 것으로 평가해 온 비판적 관점보다 훨씬 다각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Figure 4.

Structural contradictions and dilemmas in Korean developmental state as causes of discourse on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policySource: Author

한편, 권위주의 시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사료적 한계에 따라 정부 계획문서를 중심으로 정책 담론을 분석하여, 담론 형성 과정에서 학계, 언론, 시민사회 등 여러 영역의 역할과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지 못한 것은 연구의 한계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지역균형발전 담론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이 발전주의 체제에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려웠다는 점을 재차 상기하도록 한다. 수출 경제의 핵심을 이루는 중화학 공업기지는 대체로 영남권에 집중되었으며, 수도 서울은 1970년대 강남 개발과 1980년대 대대적인 합동 재개발 사업을 거치며 더욱 팽창했다. 이는 균형발전 담론이 정책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고, 정책화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의도와 부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본 연구에서 충분하게 다루지 못한 이 영역은 향후의 연구 과제로 남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주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를 수정·보완하여 작성하였으며,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분야 중견연구자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NRF-2021S1A5A2A01071565).

Notes

주1. 한국에서 국토계획 담론의 기원 자체는 식민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제국주의는 전시체제기에 자원 총동원을 목적으로 국토계획을 일본 본토와 식민지 조선에 추진하고자 했으며(염복규, 2008), 당시 일본이 구상한 국토계획의 기조는 대중 상업잡지를 통해서도 전파될 만큼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김승정, 2023: pp.153-155).
주2. 동아일보, 1968.9.10., “국토의 균형발전을 지향 3차 5개년 계획 기초작업 착수”; 매일경제, 1968.9.11., “기초작업에 착수”.
주3.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1967, “PRM 7-2 International Organizations FY'67 (3of3)”, RG286, Entry 583, Box 22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참조코드: AUS056_09_00C0305, 7-8쪽).
주4.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1969, “PRM 1 Country Activities FY'69(1of2)”, RG286, Entry 583, Box 43(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참조코드: AUS056_09_00C0557, 201쪽).
주5. USOM과 경제기획원의 17개 권역안 외에도 여러 곳에서 국토 권역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삼보 공사에서는 23개 권역안을 제시했으며, 이한순(李漢淳) 경희대학교 교수도 내무부의 자문으로 권역화 작업을 수행했다(경제기획원, 1967: pp.170-171; 건설부 주택·도시 및 지역계획 연구실, 1968: p.252).
주6. 경향신문, 1967.12.13., “경·부 2대권으로”; 매일경제, 1968.2.21., “1인당 6만 3,000여 원”.
주7. 「국토계획기본구상」에 앞서서 1967년에 「대국토건설계획」이라는 전국 단위 개발계획이 성안된 바 있었지만, 같은 해에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급히 작성된 측면이 있어서 이후 백지화되었다(건설부, 1967: p.4; 박세훈 외, 2021: p.68).
주8. ECAFE에서 지역계획이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정책 의제로 강조되었던 대표적인 사례는 1958년 7~8월 도쿄에서 개최되었던 ‘지역계획 세미나(Seminar on Regional Planning)’였다. 이 세미나의 논문집은 1962년 「국토의 개발: 지방계획」이라는 제목으로 국역되었다.
주9. 동아일보, 1963.8.9., “합리적 국토건설 광역도시계획”.
주10. 아이러니하게도 김현옥 시장 임기 첫해(1966년)에 수립된 「서울 도시기본계획」은 서울이 ‘대도시 긍정론’보다는 ‘도시 과대화 억제론’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서술했다(서울특별시, 1966:67).
주11. 조선일보, 1966.1.26., “공업시설 대폭 지방분산”.
주12. 매일경제, 1967.4.13., “분산공장 유치엔 면세 등 특전”; 경향신문, 1967.4.13., “공업입지법 작성”.
주13. 매일경제, 1967.6.22., “공업입지법 시안을 폐기”.
주14. 매일경제, 1967.5.27., “8개 지구 공단지 조성계획 수립”; 매일경제, 1967.6.1., “<광주·대구 등 8개 공단지> 연내에 전면 착수”.
주15. 경향신문, 1969.4.14., “보완책을 마련”; 조선일보, 1969.4.15., “수도 인구집중을 통제”.
주16. Ⅲ장에서 검토했던 1968년 12월의 「국토계획기본구상」도 대도시 분산론을 안보의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 문건에서 더욱 세밀한 논리로 접근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는 이를 다룬다.
주17. 조선일보, 1969.12.10., “수도인구 집중 억제 위해 서울시민 증세건의”; 조선일보, 1973.1.30., “서울시, 시민세 신설건의 가구당 연 2천 원”.
주18. 『등록세법 시행령』 제5조 제5항, 『법인세법 시행령』 제70조 제3항, 『소득세법 시행령』 제25조 제3항 (이상 1971.12.30. 개정).
주19. 『지방세법 시행령』 제50조, 제84조의2 제1항, 제142조 제2항 (1973.5.5. 개정).
주20. 『지방세법』 제70조 제1항 (1973.3.12. 개정); 『지방세법 시행령』 제51조 제1호 (1973.5.5. 개정).
주21.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1969, “PRM 1 Country Activities FY'69(1of2)”, RG286, Entry 583, Box 43(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사료참조코드: AUS056_09_00C0557, 204-205쪽).
주22. 국내 최초의 지역 산업연관표라고 할 수 있는 성과물은 1980년대 국토개발연구원(現 국토연구원)에 의해 작성되었다(조정제 외, 1983).
주23. 조선일보, 1972.11.21., “수출입국”.
주24. 조선일보, 1973.2.2., “제4공화국의 방향타 ④ 박대통령 연두순시에 나타난 「73년 시정」”.
주25. 매일경제, 1972.11.10., “전국토를 산업권화”.
주26. 동아일보, 1972.11.13., “건설부 발표 「전국토 산업권화」에 12조 투자 81년까지”.
주27. 동아일보, 1972.11.15., “모범 새마을에 공장 건설”; 매일경제, 1972.11.17., “농공균형에 전기 - 새마을공장 건설계획과 전망”.
주28. 케인스주의 복지국가의 성공과 실패, 뒤이은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한계는 단적인 역사적 사례이다(Jessop, 2002: pp.275-276).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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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1.

Figure 1.
Changes in the concept of the planning region classificationSource: Ministry of Construction (1967: p.13; 1968a: p.34),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71: p.115)Note: In the drawing of the initial concept (1967), the boundary of the Sub-Region (소권) is omitted.

Figure 2.

Figure 2.
The Concept of the industrial location (left) and the Seoul Metropolitan Area readjustment (right) in 「The 1st Comprehensive National Physical Development Plan」Sourc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71: pp.27·123)

Figure 3.

Figure 3.
The slogan of ‘Industrial Zoning of the Whole Country’ reported by 「Daehan News」Source: 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1972.11.11.; 1972.11.18.)

Figure 4.

Figure 4.
Structural contradictions and dilemmas in Korean developmental state as causes of discourse on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policySource: Author

Table 1.

Types of discourses on balanced regional development and key documents: 1962-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