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l publication date 23 Aug 2016
독일통일 전후 신탁청의 역할비교와 시사점
Abstract
Collapse of the socialist system which began mainly with former Soviet Union since the late 1980's brought about a big change in all the socialist states including Eastern Europe. Especially, this phenomenon remarkably appeared in economic aspect; existing socialist states which recognized limit of planned economy; and they promoted an extensive privatization policy as a key means.
This study reviewed a theory of system transformation as well as privatization and then, drew an implication through comparison of THA activities before and after German reunification. Especially, as the case of East German and Bulgaria, it is deemed that North Korea raises efficiency of national-owned properties through operation of organization exclusively for the properties and that it will contribute to national economy and further to sustainable development of unified Korea.
Keywords:
Privatization Policy, Treuhandanstalt in Germany, Exclusive organization for Privatization키워드:
사유화 정책, 독일 신탁청, 사유화 전담기구Ⅰ. 서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全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서 ‘통일’이 남북한의 공통적인 과제임은 양 국가 모두 인정하면서도 그 실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통일의 사례에서도 이미 경험하였듯이 ‘통일’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과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통일 완성의 시기를 앞당길 수도 늦출 수도 있는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과거 1980년대 말부터 구소련을 중심으로 시작된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는 동유럽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기존 계획경제의 한계를 인식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체제의 변혁, 즉 체제전환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게 되었고, 그 핵심적 수단으로써 대대적인 사유화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생적으로 기존 국유재산의 효율적인 관리 및 국가경제 회생을 위해 사유화(또는 민영화)를 실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사유화 전담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동유럽국가 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해 오던 아시아 국가들에도 이어져 비록 국가마다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까지도 사유화가 진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의 주된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체제전환국 중 독일은 통일과정에서 동독의 국영기업을 포함한 일체의 국유재산을 신탁청(Treuhandanstalt)1)에 귀속시켜 관리하고 동 기관을 통해 사유화(또는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동독 공기업의 사유화 추진노력은 사회주의권 사유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았다.2) 독일 신탁청의 사례는 이후 현재까지 全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반도에도 중요한 케이스로 인식되어 이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독일의 통일 전후 국유재산 사유화 과정에서 신탁청의 역할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현 시점에서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을 검토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연구는 신탁청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기존 선행 연구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하나, 신탁청의 사유화 업무와 관련한 실무자료3) 및 독일 신탁청 백서 해석본4)5) 등 독일 통일 당시의 실무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존 연구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에서는 오랜 기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남북한 통일방식에 있어 양국의 합의가 전제된 경제통합을 전제하고 먼저, 사유화이론을 검토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사유화 기관이었던 신탁청의 역할을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비교함으로써 통일준비과정에서 북한 내 해당 기구 설치에의 필요성과 적용방안을 모색하였다.
연구의 범위는 공간적 범위와 시간적 범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공간적 범위로는 체제전환을 이행한 독일과 그렇지 못한 북한이다. 시간적 범위로는 구소련의 붕괴시점인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이다. 이를 위한 주요 방법으로 문헌 분석을 수행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론적 탐구는 국내외의 학술지 게재 논문과 단행본 서적, 독일통일총서, 신탁청 백서 등을 주로 검토하였고, 각종 통계도 참고하였다. 여기에 인터넷에 공개된 관련 전자문헌과 정보 등도 보조적으로 활용하였다.
Ⅱ. 체제전환과 사유화 이론 검토
1. 체제전환
체제전환이라 함은 어느 한 체제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들이 다른 특징들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구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뀌게 만드는 모든 대체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6) 일반적으로 체제전환은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정치와 경제체제를 서방국가 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운영의 효율화를 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국가가 안정된 체제로서 유지되고 지속적인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중에서도 구성원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위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고, 이것은 경제활동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도 국가경제에 참여하고 재화를 생산해냄으로써 국가의 물질적 욕구에 부응하는 생산활동의 핵심적인 주체이다(박상봉, 1994:33). 90년대 구소련을 시작으로 한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요 원인으로 우선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의 모순과 同체제 내에서 형성된 경제 주체들의 행동양식, 그리고 생산성의 극대화 실패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계획경제 시스템은 국가계획적인 측면에서 볼 때 타당한 면도 있다. 많은 나라에서 개인의 심리적인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통한 복지사회의 실현을 최대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 무역확대, 물가안정과 같은 경제정책의 목적이 충족되어져야 하는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일하게 국가가 자원배분과 소득분배를 계획하고 통제하여야만 경제의 무정부 상태를 막아서 복지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비효율적 관료주의의 팽창을 불러올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경제의 양(quantity) 위주의 경제체제를 야기시켜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하나의 이상적인 주장으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7)
물론 경제활동에 있어 계획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나, 이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설정된 계획이 매우 전문적이고 특정한 동기가 부여된 전문가들에 의한 계획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계획 주체가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고 권력 중심부가 되어 정치적인 요소에 의한 계획의 결과가 되고 이것이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다면 국민경제 및 국가경제에 있어 엄청난 비효율을 갖고 올 수 있다. 다시 말해 창의와 동기성이 사라지고 명분과 권력에 따라 세워진 국가계획이 경제활동의 핵심적인 지표가 된다면 이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큰 손해가 될 것이다.8)
체제전환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존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유화된 재산을 사유화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출발하여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담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 모두가 재산을 공유하게 된다면 해당 국가는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논리이다.
과거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면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확대되어 소득계층 간의 불평등이 확대되며 기업이라는 생산활동의 주체는 공익보다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여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연출됨으로써 자원을 낭비하고 사회불안을 초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서 사유재산을 금지하고 재산을 국유화시킨 사회주의 체제는 무엇 때문에 평등한 사회의 실현에 실패하였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우선, 재산을 국유화시키는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실제로 사유재산으로부터 초래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사유재산을 금지하고 사회에 모든 재산을 귀속시킴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재산을 정당하게 사회화하고 공평하게 관리될 수 있느냐는 방법론적인 측면의 해답은 현재까지도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다.
사유화는 경제통합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국가계획과 통제에 의해 운영되던 경제를, 경쟁이라는 제도를 통해 운영함으로써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서독의 통일과 더불어 사유화 작업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과거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하에서의 경제활동이 효율적인 면에서 서독이 지향했던 시장경제에 못 미쳤다는 것을 의미하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부터 사유화 작업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박상봉(1994)은 원래 ‘Privatisierung’ 이라는 의미가 공기업을 개인에게 처분하는 민영화라는 표현이 적절한 면이 있지만,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신탁청(트로이한트)이 수행했던 작업은 국가에 속해 있던 재산을 민간 투자자에게 이양시키는 단순한 민영화 작업이 아니라 민영화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종지부를 찍고 사유재산권을 사회에 제도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포함된 복잡하고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사유화(Privatization)는 민간이 아닌 주체, 예를 들면 자국 혹은 외국 정부 등에 의해 소유, 관리, 운영되던 조직 등을 민간 주체에 일부 혹은 전부를 이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정부 부문에서 민간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고, 이 중에서 정부가 운영하던 공기업이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 공기업의 민영화 이외에도 공공사업의 추진에 있어 민간기업을 선정하여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사업추진을 맡기는 민자사업 등도 넓은 의미의 민영화로 본다. 여기서 국·공유기업의 소유권이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사유화, 私有化)과 경영만 민간에 맡기는 것(민영화, 民營化의 본래 의미)은 본래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둘 다 민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혼란을 준다는 견해도 있다.10)
그러나 체제전환국에서 말하는 ‘민영화’란 국영기업이 국가에 의한 직접경영으로부터 다양한 소유형태의 사적 구조, 예를 들어 주식회사, 협동농장 및 동업기업으로 변환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사유화’란 민영화의 한 방식으로 소유권 중심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유화된 기업이 민영화되지 않은 기업은 거의 없다”(황병덕, 1994, pp.192-193, 각주 30). 신탁청의 ‘민영화’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유화’되었기 때문에 ‘사유화’란 개념을 주로 사용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송태수, 2001, p.384, 각주 7).
Ⅲ. 신탁청의 역할과 기능
1. 통일 이전 신탁청
트로이한트안슈탈트(Treuhandanstalt, THA, 이하 ‘신탁청’)는 독일 통일 이전인 동독 말기에 설립되었다. 사회주의 정권 말기,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 정부 하에 조직된 신탁청은 구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선출된 국민의회의 입법활동을 통해 제모습이 갖추어졌다. 신탁청 설립을 주도한 이들은 신탁청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신탁청을 중앙통제가 배제된 가운데 시장경제적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기본틀 속에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 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회주의’를 위한 수단이 되기를 바랬다. 다른 한편으로 신탁청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형성하는데 활용하고자 했다. 즉 중요 부문은 공동소유 형태로 남겨두고, 기타 다수의 기업들은 동독주민에게 사유화하려고 했다.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 이른바 ‘제3의 길’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신탁청은 설립 당시부터 정치적인 상황이 크게 고려되었다. 서방국가들의 제안도 일부 영향을 주었으나, 신탁법 통과(1990.6.17)를 계기로 신탁청 활동 전반에 걸쳐 시민운동, 동독정부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11)
국유재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믿음직하고 착실히 관리(Treuhänderische Verwaltung)’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는 볼프강 울만(Wolfgang Ullmann)이 최초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통일을 앞두고 초당파적 의회기구인 ‘원탁회의12)’에서 Demokratie Jetzt (Democracy Now)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이미 동독의 경제적·사회적 붕괴를 논의하는 소그룹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울만은 1990년 2월 12일 개최된 원탁회의에서 신탁청 설립이 포함된 제안을 발표하였다.
Demokratie Jetzt는 마티아스 알츠(Matthias Artzt, 엔지니어), 겝하르트(Gebhardt, 물리학자), 울만(Uhllmann, 신학자) 등의 3인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동독정권이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를 타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알츠(Artzt)와 겝하르트(Gebhardt)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13)’에 빗대어 동독은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직면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작은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단체는 이러한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과도기적 상황을 극복하고 사회정책적 부문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정치자문단으로서 지속적인 자문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유연구 커뮤니티 (Selbstorganisation)’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설립 다음 날 개최된 원탁회의에 울만을 대표로 보냈고, 목표추진 과정에서 해외로부터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독이 붕괴되면 ‘자산관리기관’과 같은 국유재산의 전담기구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하고, 동독의 국유재산을 모두 인수한 후 이를 네 부문으로 나누어 관리할 신탁기구 관련 상세제안서를 마련했다(1990.2월초). 제안서의 골자는 동독 국유재산의 25%는 동독주민 모두에게 바우처(voucher) 형태로 배분해 사유화하고, 약 10%는 ‘예술 등 비영리적인 산업’ 부문에 배분하며, 나머지 3·4번째 지분은 국가소유로 함으로써 의식주나 생존에 필요한 농업 및 경제 하부구조에 양도하거나, 기타 채무 및 보상요구 등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울만 대표가 주장한 이 제안서는 이후 원탁회의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1990.2.12), 대다수 언론 역시 이 제안서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민족주의 출현(Der Demokratie Aufbruch)’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는 ‘국유기업() 대다수를 사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사회민주당(SPD, 서독의 사회민주당을 모델로 한 동독의 신생정당, 이하 사민당)은 오히려 모드로우(Modrow) 정부보다 더욱 강력하게 국유재산, 특히 토지의 부분 사유화를 지지했다.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 ‘새로운 토론광장’이라는 이름의 동독 신생정당)과 원탁회의의 경제문제 실무그룹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유지했다(1989.12월말).14)
구신탁청(Ur-THA) 설립 당시 동독은 정치·경제적 압력으로 사회주의자들이 고수하던 ‘철옹성 같은 경제 사령탑(레닌)’이 순차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사회주의체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도록 동독정권 스스로 만든 것이 바로 신탁청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독정부는 동독경제가 수년에 걸쳐 최악의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1988년 재정지출 현황 자료에 의하면, 동독은 최소 4~5년 내에 국가채무를 상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동베를린 훔볼트대학(Humboldt- Universität)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경제개혁에 대한 토론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훔볼트대학 경제학부장이었던 크리스타 루프트(Christa Luft) 교수는 1988년 10월 대학입학식 연설에서 경제개혁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총리 퇴진 후 에곤 크렌츠(Egon Krenz) 국가평의회 의장(동독 내각)이 집권하면서 정부차원에서도 경제악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민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크렌츠(Krenz) 의장이 의뢰한 동독경제 분석보고서에 주목하였다(1989.10.31). 일급기밀로 분류된 이 보고서는 동독경제 붕괴가 임박했음을 다루고 있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신속하게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국가부도를 막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1985년에 적절히 조치를 취했더라면 위기극복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현재로서는 더 이상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에 단행될 채무동결조치로 동독주민의 생활수준은 25~30% 정도 저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동독은 사실상 존속이 불가능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한편 당 기관지인 ‘신독일(Neues Deutchland)’은 ‘경제개혁 : 사회주의 회생요소’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1989.11.3). 기사는 경제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정책시행이 필요한 만큼 시장경제체제 도입이 필수적이고 이에 따른 경제혼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시장경제는 사유재산의 개념까지 포괄하지는 않았다.
모드로우 총리는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중간 형태인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동독이 향후 수년간은 건재할 것이라고 판단해 1989년 11월 17일 선언문에서 시장기능을 가미한 ‘보다 나은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이 선언에서 중앙계획경제의 개선을 경제개혁 달성에 매우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주의 국가경제는 본질적으로 매우 강하며 조만간 안정화를 이룰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모드로우 정부도 근본적인 경제개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모드로우 총리는 개혁주의자로 알려진 크리스타 루프트(Christa Luft) 교수를 경제부총리로 임명했다. 루프트 부총리는 당시 행정부를 주도하던 영향력 있는 엘리트 관료들이 경제개혁에 동참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녀는 이들의 지지를 얻기 보다는, 동독각료회의 내 ‘경제개혁 실무그룹’을 창설해 볼프람 크라우제(Wulfram Krause)를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독자적인 경제개혁 조치를 추진했다.
모드로우 총리 이후 게르하르트 빌(Gerhard Beil), 로타어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와 같은 후임 총리들은 각료회의에서 사유화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먼저, 주택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는 모든 동독경제 부문을 ‘신탁관리’ 하에 두고 사유화해야 하는 방안을 내각에 제시했다(1990.1.8). 신탁기구의 설립과 관련된 최초의 시도로 볼 수 있는 이 제안은 한 달 후에 원탁회의에서 공식안건으로 상정되었다(1990.2.12). 그러나 당시 각료회의에서 이 방안이 인준되지 못했다. 그리고 1990년 크라우제(Krause) 의장은 경제개혁 관련 기본안과 최종안을 각료회의에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결국 각료회의는 ‘경제개혁 기본방향, 목표, 기본전략, 단계 및 긴급조치안’을 통과시켰다(1990.2.1)15). 이 안은 경제안정 및 업적주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내용면에서도 과거 계획경제의 수정만을 원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조치안에는 일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앙통제적인 계획경제로부터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시장경제로의 급속한 이행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조치안 제1장에서는 ‘시장경제 이행을 위해 개방을 확대하고, 기업소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방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규정했다.
각료회의가 경제개혁안을 승인하자 원탁회의는 개혁안의 실행을 지시했다. 원탁회의는 개혁안이 일부 불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경제개혁 추진을 위해 기초가 될 것이라며 이 개혁안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안은 1990년 2월 당시 이미 동·서독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다소 늦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국가정책에서 중요 조치들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원탁회의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모드로우 총리는 재야세력을 포함한 ‘범국민적 정부’를 구성해 총선까지 국정을 담당할 것을 제안했다(1990.1.28.). 그리고 그는 한 연설에서 야당이 자주 사용하던 ‘우리의 통일조국, 독일(동독국가 중 한 구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990.2.1). 이는 동독의 정치상황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통일지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따라서 동독정권의 붕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로 여겨졌다. ‘분단’의 상징적 의미가 담긴 베를린 장벽의 조각이 대중에게 일종의 ‘기념상품화’ 되어 팔리기 시작했고(1990.1.21), 그 무렵 각료회의에서는 ‘동료’라는 단어(이전에는 ‘동지’)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16)
1990년 상반기에는 서독 전문가들도 동독 경제개혁을 위한 다양한 모델을 연구하였다. 이는 서독 내독성(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 hungen) 조차도 아직 명확한 동·서독 통합전략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서방세계의 경제개혁안들은 주로 국유재산 분리 및 사유화, 통화 및 법체계 개정 등의 이슈가 다루어졌다. 이들 제안의 대부분은 1990년 1~2월에 출판되어 동독의 신탁청 설립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연방재무부(Bundesministerium der Finanzen, BMF) 경제자문위원회는 특별 평가보고서를 통해 동독의 콤비나트를 소규모로 분할한 후 사유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990.1.20). 이 보고서에는 동독주민들이 종업원 지분을 인수하거나 보통주를 우선주 가격에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중앙은행의 페터 보핑커(Peter Bofinger) 경제분과위원은 지주회사를 통해 동독생산자본 일체를 양도받아 5년 내 주요 기업을 분할한 후 지분을 주식시장에 매각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라프(Graf Matuschka; M&A 전문 경영자문회사 대표)는 기업의 신속한 사유화를 위해 국민주를 전체 지분의 49% 한도 내에서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7) 테오 바이겔(Theo Waigel) 연방재무부장관 역시 국민주 방식을 제안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당시 서독 전문가들이 동독의 국유재산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동독의 국유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주목했다. 또한 기구의 목적 및 책임한도에 대해서는 다소 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신탁기구와 같은 국유재산관리 전담기구를 신속히 설립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을 모았다.
신탁청은 두 종류의 법적절차에 따라 설립된 두 개의 조직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명령(1990.3.17)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회의 입법(1990.6.17)에 기초한 것이다. 통일 이후의 신탁청은 구신탁청(Ur-THA)를 모태로 하고 있지만, 두 기구의 목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신탁청은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대다수는 특정인의 이름과 연계되어 있다(Modrow-신탁청 등). 본 연구에서는 신탁청의 설립 자체가 개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탁청을 ‘구신탁청’으로, 법률상의 신탁청을 ‘신탁청’으로 표현하였다.
신탁청의 활동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시민운동의 1차 목표는 대부분 이미 달성된 상태였으므로 이후에는 ‘인민소유’의 보장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국유재산은 민법에 따라 법적기구로 이관되며, 아울러 외부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동독의 엘리트 계층은 서로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면서 동독을 팔아넘기는데 대한 두려움이 상당했다. 더욱이 당시 서베를린에서는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가 1:18로 암거래되고 있는 상태였다. 동독주민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데 동감했지만, 핵심 쟁점은 국유재산을 동독주민들에게 어떻게 분배하는 가에 대한 방법이었다. 데모크라티 에츠트(Demokratie Jetzt)는 국유재산의 약 ¼을 동독주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민당은 ¾을 무상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르스트 샤이더(Horst Scheider)와 마틴 볼프(Martin Wolf, 사민당 소속)의 추정에 따르면, 동독 국유재산은 총 1조4천억 동독DM이며, 이는 약 30%의 파산손실비용을 공제해서 총액기준으로 동독주민 1인당 약 40,000 동독DM가 배분될 수 있는 규모였다. 반면, 연방재무부 경제자문위원회는 동독의 국유재산 규모가 수천억 DM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했다.
울만 대표는 크라우제 의장이 제시한 신탁청 설립안에 대해 즉각적인 동의를 표하지 않는 대신, 본인이 활동하고 있는 자유연구커뮤니티에 전달해 상세히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이 조직은 초안이 바우처 제도에 대한 자신들의 핵심요구를 담고 있지 않고 있는 등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다고 반대를 표명했다. 루프트 부총리, 울만 대표 등은 다시 이 단체에게 내용을 보강해 보다 상세한 비판문건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자유연구커뮤니티의 제안서에서 제기한 쟁점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쟁점들은 이후 드 메지에르(de Maizière) 정부 하의 신탁법 논쟁에서도 핵심적인 사항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긴급한 안건은 구신탁청 설립문제였다.
울만 대표가 제시한 대안은 논쟁사항들을 잘 반영했다. 이 안에는 각 주의회의 감독 하에 주별로 신탁청을 설립하고(제1조), 기관들은 재산의 소유권자가 아닌 ‘국유소유와 신규소유자 간의 중재기관’이 되어야 하며(제4조), 각 주는 경쟁입찰을 통해 외국인투자자가 지분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제5조)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두 개의 안은 시간적 제약 때문에 충분한 논의없이 정부안대로 각료회의에서 통과되었다(1990.3.1). 정부안에 대해 울만 대표도 일부 불만족스러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인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정치권을 비롯한 대중여론의 반응은 이와는 대조적이었다. 비록 당시가 선거의 막바지였다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구신탁청 설립은 대중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시민단체들은 ‘인민재산의 강탈’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고, 사민당은 법원에 의해 기각되기는 했으나 신탁청 설치령에 대해 베를린재판소에 제소까지 하기에 이른다.18)
당시 거의 모든 정파가 구신탁청 설립에 만족하지 못했다. 반면 모드로우 정부는 신탁청의 향후 성과를 확신하고 설립작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구신탁청은 정관이 통과되자(1990.3.15), 구신탁청은 본부(베를린) 및 15개 지부로 구성되었다. 구신탁청 청장에 페터 모레트(Peter Moreth, 사민당 출신, 前 모드로우 정부의 장관)가 임명되었고, 부청장에는 볼프람 크라우제가 임명됐다. 설립 초기 신탁청은 모든 면에서 매우 부실했다.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주요 업무는 모레트 청장 개인 사무실에서 집행되었고, 이후에는 기능이 정지된 외무부장관실로 옮겨져 이루어졌다. 사무시설 또한 직원 수 91명에 타자기 10대, 복사기 3대, 업무용 차량은 9대에 불과했다(1990.4월 기준). 향후 조직계획에 따르면, 1990년 7월까지 최대 143명의 직원이 8,000여 개의 콤비나트 및 기업들을 처리·관리해야 했다. 구신탁청은 콤비나트 및 모든 기업을 인수해 그 중 일부는 분리한 뒤 자본회사로 전환해야 했는데, 이러한 모든 작업을 화폐통합 이전인 3개월 내 완료해야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군관출신들은 배제되고 재무부 등을 포함해 각 부처에서 차출되었으나, 적절한 직무훈련을 받은 전문인력은 거의 없었다.
구신탁청은 콤비나트와 개별기업의 분리 및 전환, 불법매각 방지, 매각을 통한 자금조성(국가재정 건전화, 창업자금 지원, 화폐통합 등에 기여) 등을 중심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구신탁청은 약 4,000개 기업의 전환자문을 하면서 주로 서독의 유한회사(GmbH)나 주식회사(AG)의 정관 및 계약서 모델을 활용해 회사 관련 조문을 작성했다. 또한 ‘동등한 권리를 갖는 시장 내에서 복수의 경쟁자’를 만들어 낸다는 목표로 회사분리 작업을 수행했고, 일부 경쟁력이 부족한 기업들은 기업 간 합병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구신탁청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자본회사로의 전환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수 천여 개의 계약을 감독해야 했는데, 동베를린 내 공증인(Notar)으로는 모자라 결국 서독의 공증인과 연결하여 공증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구신탁청 활동 초기 기업전환 업무를 150건을 처리하는데 약 6주가 소요되었다. 특히 업무처리능력과 경험이 부족했던 구신탁청은 서독 연방재무부와 공동으로 기업가치 평가에 대한 지침을 작성해 이 지침에 따라 기업전환 업무를 진행했다.
1990년 4월 경, 구신탁청은 동독기업 경쟁력에 대한 추정자료를 발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동독기업의 약 30%는 화폐통합 이후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고, 약 50%는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제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20%의 기업들은 파산이 불가피하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두 달 후 발표된 기업들의 자체 감정 결과는 이와 달랐다. 기업의 40%는 스스로가 경쟁력이 있다고 여겼지만, 30%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평가했으며, 나머지 30%는 파산위기에 처해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파산상태에 있는 기업들은 대체로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구신탁청은 화폐통합 때까지 3,600여 개 기업을 자본회사로 전환했고, 나머지 4,000여 개 기업은 자본회사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었다. 또한 약 2,800여 개의 대다수 중소기업은 재사유화 되거나 합작회사(Joint Venture)로 전환되었다. 당시 구신탁청의 성과에 대해 미흡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전환작업이 모두 완료되지 않았던 영향을 받은 탓도 있다.19)
2. 통일 이후 신탁청
1990년 여름에 결국 ‘광범위한 사유재산의 인정을 통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국유재산 사유화 및 재편성에 관한 법률’(THG, 이하 ‘신탁법’)이 제정되었다. 이때부터 신탁청은 서독과 동독 간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동독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하면서 모든 사유재산이 국유화되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임무를 이행하게 된 것이다.20)
총선에서 기민당(CDU)이 승리하고, 드 메지에르(de Maizière) 총리가 선출되었다(1990.3.18). 내각에는 좌파성향의 시민운동 출신 인사가 선임되지 못했기 때문에(1990.4.12) 새로운 연립정부가 신탁청의 문제를 다각도로 논의하였다. 그런데 신탁청이 룸베르그(Romberg) 재무부장관(사민당 출신)과 폴(Pohl) 경제부장관(기민당 출신) 중 누구에게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지를 두고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에 드 메지에르 총리는 신탁청을 총리실 산하에 두고 관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새로운 법령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신탁법보다 더 시급했던 현안은 동·서독 간 국가조약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이는 향후 제정될 신탁법에 대한 중요한 문제들과도 밀접히 연관되었다. 예를 들어 국유재산은 우선적으로 경제구조개혁 및 국가예산균형을 위해 활용되어야 하며, 저축예금자 지원을 위한 국유재산의 활용은 부차적인 것으로 명시되었다. 또한 이 조약에는 사유화 관련 문제들도 명시되었다.
이후 새로운 신탁법 관련 초안이 다수 만들어졌다. 이 중 중요한 것은 이른바 ‘본(Bonn) 구상’과 ‘빌레펠트(Bielefeld) 구상'이었다. 작센연합(Allianz Sachsen, 기민당·독일사회연합 등의 연합)이 제안한 경제통합안의 경우는 정부의 신탁법 제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작센연합은 활동 초기부터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헤르베르트 슈미트(Herbert B. Schmidt) 작센연합 의장은 선거지원을 위해 동독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총선에 승리한 후 그는 작센연합의 경제통합기구를 조직했고, 이 기구를 통해 전략적 목표 중 하나였던 구신탁청 개편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제1차 개편안은 1990년 3월부터 작성되어 4월 8일에 구체적 시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연방총리실과 연방경제부는 신탁법에 관한 '본(Bonn) 구상'을 제출했다(1990.5.17). 이 구상에 따르면, 상업용·주거용·농업용 등 자산별로 3개의 주식회사 형태의 조직을 설치하고자 했다. 즉 서독 주식회사의 특징인 자유로운 의사결정, 명확한 책임소재, 대의에 의한 종업원의 경영참여, 중앙으로부터의 간섭배제 등을 추구했다. 주식회사가 공법 하의 기관보다는 유연성 및 추진력에서 훨씬 나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전문가와 정치인들은 신탁법이 본(Bonn) 구상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드 메지에르 총리는 법률, 재정, 경제, 정치분야를 각각 대표하는 6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실무그룹이 시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다양한 전략과 개인 제안들이 실무그룹에 접수되었고, 그 중 다수의 의미있는 아이디어들은 서독 본(Bonn)의 연방재무부에서 제안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의회의 논의와 경제위원회의 법률적 검토를 거쳐 신탁법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이후 의회는 제15차 회의에서 다수의 찬성으로 신탁법(국유재산 사유화 및 재편성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게 되었다(1990.6.17.).21)
Ⅳ. 신탁청의 평가 및 시사점
1. 신탁청의 공법적 특성
신탁청 설립 후(1990.3.1), 법률적 설치근거 및 법적의무가 수차례 변경되었으나, 조직의 법적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구신탁청(Ur-THA)은 모드로우 정부에 의해 1990년 3~6월 간 설립·운영되었다. ‘국유재산의 신탁관리를 위한 기구의 설립에 관한 결정, 1990.3.1)’과 ‘국유재산의 신탁관리를 위한 신탁청 정관 제정(구신탁청 정관, 1990.3.12)’을 통해 관련 입법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는 ‘국유재산의 신탁기구에 관한 법령(구신탁청 법령)’이 제정되면서 내용이 보강되었다(1990.3.15).
이 법안들에는 모두 ‘공법상 기구’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구신탁청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공법상’이라는 용어는 당시 동독에서는 일반화되지 않았다. 즉 국가행정부 관할에서 분리된 독립된 행정기구는 동독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중앙통제 관리시스템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모드로우 정부는 1990년 2월 이후 경제부문에서 의사결정 구조의 탈중앙화를 추진한다는 생각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신탁청은 서독과 같은 공법상의 기구설립 및 경제·행정업무의 행정적 독립성을 지향한 것이다.
‘국유재산 사유화 및 재편성에 관한 법률(Treuhandgesetz, THG)’이 발표(1990.6.17)되어 위에서 언급한 법적근거에 따라 구신탁청은 해체되었다(신탁법 제24조 제3항). 대신 새로운 신탁청이 공법상의 기구로서 자격을 부여받았다(신탁법 제2조 제1항). 신탁법도 서독의 법률적 모델을 따른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동독 신탁청의 조직에 관한 서독의 ‘빌레펠트 구상’을 받아들였다(1990.5.20). 이 개혁안은 기구의 책임이 국가가 귀속하는 서독식 공법상 기구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신탁청의 활동 결과
신탁청은 1990-1994년 활동 종료 전까지 약 14,000여개의 구동독 국유기업의 사유화를 완료하였다. 특히 이 중 약 ¾ 이상이 MBO (Management Buyout; 내부경영자 인수방식) 및 국내·외 투자자 매각으로 사유화를 진행하였다.
외국인 투자의 경우 전체 사유화기업의 약 10%에 해당된다. 이는 신탁청 활동 기간 당시 서독투자자 우선주의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판단된다.
3. 시사점
최근 독일 통일에 있어 지난 1990년 통일 직후 2015년까지 구동독 지역경제 재건 및 인프라 투자에 투입된 비용이 약 450조 원에 이른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22) 특히 약 40배에 이르는 남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 통일 시 독일의 사례보다 더 많은 비용이 지출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서 향후 한반도 통일에 대비해 단계적 경제협력을 확대해서 경제적 리스크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한다. 따라서 통일비용 준비에 대한 계획 수립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통일 이전부터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의 사유화 전담기구 설립에 대한 시도는 한반도 통일에 대비하여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에 따라 독일통일 전후 시점에서 설립되었던 신탁청의 사례를 바탕으로 북한지역 국유재산 전담기구의 설립방안을 모색해 보았다.
구 동독과 불가리아의 사례처럼 북한도 국유재산 관리업무를 수행할 전담기구 운영을 통해 국유재산 관리의 효율성을 제고하여 국가경제에 이바지하고 더 나아가 통일한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전담기구는 북한 내 국·공유재산의 사유화를 통해 생산효율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장점을 북한에 정착시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주민의 생활안정 및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한다면 점진적인 사유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특히 북한이 주체가 되어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국유재산 관리노하우가 접목된다면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
먼저 1단계에서는 독일 신탁청에 대한 모형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신탁청과 후속기관을 포함한 전체적인 업무 매뉴얼 등을 체계화해야 한다.
다음 2단계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한 동유럽 체제전환국들의 국유재산 관리(사유화 포함) 전담기구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비교·분석 후 각각의 장·단점을 보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3단계에서는 1단계 결과에 2단계 결과를 포함한 신개념의 자산관리개념이 도입된 북한식 맞춤형 국유재산 전담기구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오랜 국유재산의 효율적인 관리 노하우23)도 반영될 경우 남북한 경제협력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다.
4단계에서는 이전 단계에서의 결론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기본방향을 바탕으로 전담기구의 단계별 설립방향은 크게 5단계 단계로 나누어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1단계에서는 남북교류를 통한 국유재산 관리협력방안에 대한 공감대 형성 노력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경제교류협력에서 기존 인력협력에서 한 단계 도약된 북한의 내수시장 활성화 지원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북한의 인적자원을 넘어 국유재산 활용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2단계에서는 남북한이 합의한 북한지역 내 국유재산 관리전담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통일을 위한 진정한 협력체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3단계에서는 남북한의 국유재산 유형별 분류를 위한 공통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해 기존 법령의 재개정이 필요하다.
4단계에서는 북한지역 국유재산의 유지와 사유화 대상을 구분하는 분류작업을 시행한다. 분류작업이 완료되면 마지막 5단계에서는 분야별 후속기관 설립을 통해 국유재산의 전문적인 관리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⑴ 운영형태
독일 신탁청은 동독 정부가 통일 이전 국유재산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설치한 한시적 기구이다. 그러나 독일 통일 과정에서 사유화 업무를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되었고, 공식 활동 종료 후에도 후속 기관으로 세분화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최근 북한은 시장경제체제의 부분적 도입을 통해 경제 활성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결국 통일 이전 제한적인 사유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유럽 체제전환국들과 같이 효율적인 사유화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미래 한반도에는 한국 경제체제의 자연스러운 이식을 위해서도 북한지역 국유재산관리 전담기구가 설립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기본구상 3단계에서 한국이 북한과 협력하여 전담기구를 설립할 경우를 검토하였다. 이 경우 여러 방안 중에서 기존 한국의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총괄청을 중심으로 업무 관계 부처가 총괄청 산하에 별도의 독립기구를 신설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안은 북한 국유재산의 관리 및 사유화 처리를 전담할 정부운영의 신탁기관을 총괄청 산하에 새롭게 설치하는 것인데, 특화된 업무에 따른 전문성·효율성을 제고하고 종합적·장기적인 관점에서 집중적인 관리가 용이하며 관리 일원화로 정부와의 긴밀한 업무 협조 등이 장점이다.
그리고 기존 조직을 활용하는 경우에는 국유재산 관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기관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위탁기관이 보유한 인력, 업무경험 및 전문성, 시스템 등에서 행정적·경제적 효율성이 증대될 수 있고, 다만 업무량의 과다한 확대에 따른 인력 증원 방안 등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⑵ 기구 명칭
신설기구는 행정기구 형태는 청으로 하고, ‘한반도 자산관리청’으로 하여 국유재산 관리업무에 있어 고유권한을 부여하여 독일의 신탁청 수준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국유재산 관리전담기구의 설립형태는 공공성, 남북 협력 성격 등을 감안하여 국유재산 관리 총괄청인 기획재정부 산하로 둘 필요가 있다.
⑶ 운영 기간
자산관리청은 사유화 진척 정도를 평가해 관련 업무를 유관기구로 이전하는 등 한시적 운영을 원칙으로 한다. 광범위한 업무 및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만큼 구성원의 전문역량을 확보하고 정부 내 지사 설치를 통해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장기적(10년)으로 사유화 마스터플랜을 위해 통일 이전 북한 국유재산의 효율적 관리와 사유화 방안을 모색하는 목표를 설정한다.
⑷ 조직 구성
자산관리청은 업무 성격에 따라 청장, 이사회, 재산조사부, 국유지개발부, 경영지원부, 재국유화·사유화부 등 선형조직(Matrix Organization)으로 구성한다.
Ⅴ. 결론
이제까지 독일 통일과정에서 구동독의 기존 국유재산 관리 및 사유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탁청에 대해 통일 전후의 성과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흔히 우리가 독일의 신탁청에 대해 얘기할 때, 쉽게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신탁청의 설립과 관련하여 독일 통일 후에 사유화 작업을 주요 업무로 한 기관으로만 아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동독에서 통일 이전 공산정권이 자발적으로 국유재산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숙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설립과정에서 여러 반대도 있었지만 모드로우 정부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중간 형태인 제3의 길을 모색하였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신탁청은 별도의 기관설립 없이 통일 후에 (역할과 기능이 강화된) 사유화 전담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동독의 신탁청이 통일 이후에도 지속가능했던 이유 중에는 모드로우 총리 이후 게르하르트 빌, 로타어 드 메지에르와 같은 후임 총리들의 역할이 컸던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각료회의에서 사유화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택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는 모든 동독경제 부문을 ‘신탁관리’ 하에 두고 사유화하는 방안이 내각에 제출되었다(1990.1.8).
독일통일 당시 동독지역의 경제환경은 좋지 않았다. 특히 동독주민의 이탈방지를 위해 실질임금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전통적인 수학과 금융부문에서의 교육 부실은 동독제품의 품질하락으로 이어졌다. 통일 이전에 동독정부는 서독과의 합작투자로 경제안정화를 도모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국영기업의 사유화 전담기구이자 공법기구인 신탁청을 설립하게 된다. 신탁청은 분명 동독정부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통일 후 조직과 기능이 보완되어 본격적으로 동독기업의 사유화업무를 추진할 수 있었다. 신탁청의 주요 업무는 시장에서 경쟁력 및 구조조정 가능성이 있는 모든 국영기업을 대상으로 사유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통일은 당시 1,700만여 명의 동독주민들이 자유를 얻은 점, 군사적 위험이 사라진 점, 통일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 독일이 유럽연합(EU)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하게 된 점 등은 초기의 경제적 혼란 및 사회갈등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선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은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은 한반도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고, 행복한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특히 북한지역) 국유재산의 효율적 관리가 선행되었을 때 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는 독일의 사례를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구 동독의 사례처럼 북한도 국유재산 관리업무를 수행할 전담기구 운영을 통해 국유재산 관리의 효율성을 제고하여 국가경제에 이바지하고 더 나아가 통일한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전담기구는 북한지역 내 국유재산의 사유화를 통해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장점을 북한 사회 내에 정착시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북한주민의 생활안정 및 사회적 형평성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통일 이전인 현 시점에서는 북한이 주체가 되어 단계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국유재산 관리노하우가 접목된다면 보다 효율적일 수 있고, 남북 경제협력의 취지에도 부합할 수 있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독일 신탁청 업무결과 및 한반도에의 시사점을 중심으로 검토했지만, 구체적·체계적인 전담기구 모형 도출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후속연구를 통해 구체화 및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토대가 될 수 있는 전담기구의 모델링화 논의가 추가될 필요가 있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2016 (사)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춘계산학학술대회’ 발표문 「독일통일 전후 신탁청의 역할비교와 시사점」을 수정·보완한 것임. 또한 통일부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2015년에 수행된 독일통일 총서 11. 신탁관리청 분야의 「통독 전후 신탁청의 역할비교와 한반도에의 시사점」 연구를 수정·보완한 것임.
Notes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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