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publication date Jan 2015
국가 권력과 공간 : 북한의 수도계획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apital planning of Pyongyang, the capital of North Korea. North Korea is a “Theatre State”, Pyongyang serves as its main stage. After the Korean War, North Korea focused on building up its capital, Pyongyang, in oder to reinforce state power and strengthen the power of ruling class. They tried to differentiate Pyongyang from other cities and fortify its status as the nation’s capital by constructing huge architectures and conducting large scale national ceremonies. As North Korea is in the process of passing down the ruling power to Kim Jong-un, the third generation of the Kim dynasty, it is likely that Pyongyang may once again be embellished as the main political stage.
Keywords:
North Korea, Pyongyang, Urban Planning, Capital Planning키워드:
북한, 평양, 도시계획, 수도계획Ⅰ. 서 론
이 연구의 목적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도시계획, 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도계획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북한관련 학계는 북한을 대표하는 평양의 정치적 상징성에 주목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도시 관련 학계는 북한 도시에 대한 전반적인 무관심에 더하여 도시계획과 구분되는 수도계획의 차원에서 평양을 면밀하게 고찰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는 수도계획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편이다1). 근대국가에서 수도가 차지하는 위상은 일반적으로 막강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 이 연구의 가정이다. 평양은 명실상부한 ‘북한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북한을 기본적으로 ‘극장국가’로, 그리고 평양을 그것의 대표적 ‘공연무대’으로 인식한다.
수도계획의 관점에서 평양을 연구하는 일은 학문적으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어야 한다. 정치사회학이나 역사사회학, 도시사회학은 물론이고 건축학이나 지리학, 도시계획학, 도시계획사 분야와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분야이다. 하지만 수도 평양을 실제로 분석하는 데에는 자료의 제한과 접근성의 한계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Ⅱ. 이론적 배경
1. 수도계획론
무릇 도시는 저절로 탄생하거나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역사적으로 탄생하고 인공적으로 관리된다. 통상 도시라는 말 뒤에 계획, 설계, 건설, 개조, 재생, 재정비 등이 붙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도시를 인위적으로 처음 ‘발명’한 것은 지배 권력이었다. 그런 만큼 도시와 정치는 본질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시형태(urban form) 자체가 나름 정치적 의미를 띨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 형태는 특정한 정치적 가치의 결과적 징표(symptom)일수도 있고, 의도적 상징(symbol)일수도 있다(Sonne, 2003:29). 도시에 대한 독해법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도상학(political iconography)이다2).
공공의 이름으로 도시에 대한 ‘계획’이 본격화된 것은 근대 이후다3).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근대국가의 태동과 산업혁명의 여파에 의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유럽사에서 근대의 문을 연 것은 그곳 특유의 자치도시들(corporate towns)이었다(브로델, 1995).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자본주의의 온상으로서 이들은 농촌중심의 분권적 봉건체제를 붕괴시켰다. 유럽의 17-8세기는 따라서 새로 등장한 근대국가가 기존 중세도시들과의 관계가 재조정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푸코(2011:33)에 의하면 그것은 도시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순환 공간 내에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곧, 기본적으로 폐쇄성과 방호적(防護的) 성격을 가지고 있던 중세시대의 도시는 근대국가 체제 하에서 공간적, 법률적, 행정적, 경제적으로 해방되었다.
근대국가는 특히 그 나라의 대표도시, 곧 수도의 건설을 요구하였다4). 유럽에서 근대국가와 수도건설은 동반성장의 관계였다. 푸코(2011:33)가 17세기 중반 알렉상드르 르 메트르가 쓴 <수도론>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르 메트르는 “영토의 수도화” 개념을 제시하면서 영토와 수도의 바람직한 관계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푸코, 2011:35-38, 42)5). 첫째, 훌륭한 국가는 원의 형태를 가지며, 그 중심에 수도가 존재하는 기하학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둘째, 수도는 “영토의 장식”으로서 양자의 관계는 미학적이고 상징적이어야 한다. 셋째, 수도는 “상업의 장소”로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17세기 유럽에서 태동한 근대국가는 19-20세기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발흥하고 풍미했다. 그리고 근대국가의 확산과 경쟁은 당연히 수도 및 수도계획의 발전을 동반했다. 수도계획은 도시계획의 일종이면서도 그것과 구분되는 그 무엇이었다(Gordon, 2006:1). 우선 수도는 영토를 읽는 ‘국가의 눈’이 되었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사회의 규율장치는 파놉티콘(Panopticon) 원리에 입각한 시선의 힘이다(푸코, 1994). 그리고 근대적 국가권력의 원천 또한 자연과 세상에 대한 가독성(legibility)의 획기적 증대에 있다(스콧, 2010). 이 때 수도는 이른바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의 원형감시 망루가 된다. 국가의 응시 혹은 독해 역량을 늘이기 위한 전형적인 방법이 국가 단순화(state simplification) 프로젝트인데, 여기에는 중앙집권적 교통망과 통신설비, 도량형 통일, 표준어 제정, 성씨 제정 등이 포함된다(스콧, 2010:97-140).
둘째, 수도는 국가의 눈이면서 ‘국가의 입’이기도 하다. 근대국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존재를 시각적, 언술적 실행을 통해 나타내려는 경향이다. 국가는 관료제나 강제력 등으로 표현되는 ‘사물’(thing)이기도 하고, 사회집단이나 계급 등과 맺고 있는 ‘관계’(relation)이기도 하지만, 영토의 내부 및 외부,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발현하는 ‘효과’(effect)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다(한석정, 1999:29, 37, 40, 46-47, 231). 효과로서의 국가에 주목할 경우, 국가는 발언하고 주장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 때 말을 하는 입이 다름 아닌 수도다. 근대국가의 지배엘리트들이 수도를 거창하고 상징적인 의례 중심으로 변모시키는 일에 서로 경쟁적으로 임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다카시, 2003:60-62).
요컨대 근대국가에게 수도는 국가의 눈이자 입이다. 수도를 대상으로 하는 도시계획의 목표가 수도를 일국(一國)의 눈과 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나폴레옹 3세 치하 오스만의 파리대개조 사업이 대표하는 하드웨어 중심의 물리적 도시계획이 있었다. 엄청난 도시면적, 사통팔달의 대로, 육중한 공공건물 등은 파리를 위시하여 마드리드, 상트페테르부르크, 빈, 베를린, 로마, 워싱턴, 런던을 휩쓸었고, 그 파장은 인도나 호주 등 식민지국가의 수도까지 도달했다. 대한제국을 선언한 고종이 한양에서 황도(皇都) 건설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 수단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수도계획이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개별국가의 독특한 정체성을 각인하고 과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수단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홉스봄(2004)이 말하는 ‘전통의 발명’(invention of tradition)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국민국가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는 전통들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국가의 권위와 특권을 고양하기 위해 국경일, 의례, 영웅, 상징물 등을 전통의 이름으로 창조하려는 국가전략이자 사회공학이었다. 이 때 태동한 공식의례나 공공기념물은 대개 수도를 무대로 삼았으며, 그런 만큼 수도공간은 공적 ‘기억의 경관’(memoryscape)을 형성했다.
하지만 수도의 디자인 정치를 순수한 민족주의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Vale, 2006:30-31). 수도가 민족적 정체성을 진작시킬 수도 있지만 개인적, 권역적 혹은 초국가적 야망의 구현에 목표를 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도계획이 도시계획 일반과 전혀 무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해서 수도에 대한 도시계획이 도시계획의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수도는 당대의 첨단 도시계획에 비해 오히려 ‘복고적’ 경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국가적 도시’라는 지위 혹은 ‘국가적 미장셴’이라는 위상 때문에 시민적 친근함을 고려하는 대신 넓은 도로나 강한 축선에 기초한 전근대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일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Vale, 2006:36). 결국, 수도에 대한 계획과 설계는 그것이 그곳에 위치하게 된 정치적, 경제적 및 사회적 힘과 분리할 수 없다(Vale, 1992; Vale, 2006:15). 분명한 것은 계획적으로 건설된 수도일수록 국가권력의 적나라한 상징이 된다는 점이다(Sonne, 2003:29). 수도계획은 기술·기능적 혹은 형식적인 이슈를 넘어 정치적 맥락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Sonne, 2003:32).
유럽사를 기준을 볼 때 수도는 18-9세기 이후의 산물이다. 특히 20세기 국민국가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수도건설 내지 수도재건이 범세계적으로 성행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900년과 2000년을 비교할 경우, 백 년 전의 수도 가운데 3/4은 백년 후에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는 사실이다(Vale, 2006). 이는 제국주의의 붕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신생국가들의 태동, 초국가적 국제기구의 등장 등에 의해 초래된 거대한 정치변동의 결과였다. 요컨대 수도의 기능이나 위상, 혹은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턴가 수도는 “한 나라의 정부가 입지한 곳”이라고 한 마디로 간단히 정의할 바가 아니게 되었다.6)
이와 관련하여 홀은 현존하는 수도의 종류를 7가지로 구분하고 있다(Hall, 2006). 첫째는 ‘복합기능 수도’(Multi-Function Capitals)로서 최고 수준의 국가기능 전부 혹은 대부분을 수행한다. 런던, 파리, 도쿄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세계적 수도’(Global Capitals)로서 일국의 수도이지만 정치나 무역 등에 차원에서 초국가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인데, 런던과 도쿄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정치적 수도’(Political Capitals)이다. 이는 워싱턴 DC나 오타와, 캔버라처럼 정부만 입지한 도시를 의미한다. 넷째로는 ‘이전(以前) 수도’(Former Capitals)가 있다. 정치적 역할은 상실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는 상페테스부르크나 리우데자네이로가 대표적이다. 다섯째는 ‘제국의 구(舊)수도’(Ex-Imperial Capitals)인데, 현재에는 일국의 수도이지만 과거 식민지 국가들에 대해 상업적 및 문화적 역할을 여전히 중요하게 수행하는 경우다. 런던이나 비엔나, 리스본이 이 경우다. 여섯째는 밀란이나 시드니, 토론토 같은 ‘역내수도’(Provincial Capitals)이다. 이는 한 때 사실상의 전국의 수도 기능을 수행했으며, 현재까지 주변 지역에 대한 수도의 역할이 남아있는 도시들을 말한다. 독특하게도 뉴욕은 세계적 지역수도다. 끝으로 ‘초국가 수도’(Super Capitals)가 있다. 이는 브뤼셀이나 제네바, 뉴욕처럼 일국의 수도 여하와 상관없이 국제기구의 중심부가 된 도시를 일컫는다. 물론 지구상의 수도들이 위의 유형 가운데 하나로 확실히 분류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 존재하는 수도는 전통적인 ‘복합기능 수도’이며, 북한의 수도인 평양도 여기에 해당한다.7)
2. 극장국가론
서구 근대국가의 역사적 태동과 그것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가장 대표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막스 베버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강제적 물리력에 기반을 둔 ‘제도적 실체’(institutional reality)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인류학자 기어츠(Geertz, 1980)의 생각은 그것과 크게 달랐다. 기어츠는 문명국가 혹은 근대국가의 반대 입장에 서서, 19세기 말 발리 섬의 왕실의례를 연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네가라’(Negara)(발리어로 정치적 영역 또는 국가)가 외래 인도문명으로부터 받아들인 힌두이즘을 사회운영의 시나리오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네가라의 경우 정치적 권위는 왕이 사회와 우주의 중심임을 주기적인 의식을 통해 과시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기어츠는 권력이란 “상호작용하는 상징의 체계”(systems of interacting symbols) 혹은 “상호 작동하는 의미의 양식”(patterns of interworking meanings)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 국가운영의 핵심원리는 다름 아닌 연극인데, 이런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 바로 ‘극장국가’(theater state) 이론이다. 요컨대 극장국가는 권력의 정치(politics of power)가 아니라 ‘과시의 정치’(politics of display)다. 그리고 이때 수도나 궁정은 연출을 통해 과시되는 우주적 질서의 미니추어(miniature)가 되는데, 이를 기어츠는 ‘모범적 중심’이라 불렀다.
극장국가에서는 국민 전체가 연기의 행위를 공유하면서 연극에 동참한다. 예컨대 발리 섬에서 왕은 시나리오를 갖고 있는 흥행주이고, 승려는 연출가이며, 농민은 배우와 관객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다. 결국,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시나리오에 함께 엮여 있는 연기자라는 점에 극장국가의 특징이 있다. 연기가 곧 정치인만큼, 극장국가는 모든 사람이 정치적으로 서로 얽혀있는 ‘정치지상주의’를 지향한다. 그곳에는 각자 맡은 바 충실한 연기수행을 통해 국가전체를 극장으로 유지하는 것이 최종목표다. 따라서 정치적 갈등은 원천적으로 부재(不在)할 수밖에 없다.
극장국가론의 가치는 19세기 발리 섬의 통치구조가 비록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원리의 측면에서 볼 때 결코 특이하거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권력의 상징체계 중심에 위치하는 신성한 왕을 숭배하는 의례는 “본질적으로 불변의 문화형태”로서, 기어츠의 극장국가는 결코 어느 특정한 왕조에 국한된 극장이 아니라는 것이다(다카시, 2003:47). 네가라 모델은 따라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 유사해 보이는 제도들 전체의 표상을 구성하기 위한 안내서이자 일종의 사회학적 청사진”의 의미를 갖게 된다(다카시, 2003:48).
극장국가론은 근대 서구에서 출현한 국민국가 역시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상징적 의례 혹은 문화적 현상의 예외가 아니라고 이해한다. 전통국가의 권력이 제도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장엄한 종교의례 같은 공연을 토대로 했던 것처럼, 세속적 현대국가의 권력도 군사력의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종교적 모습의 대중연설 같은 주로 권력의 의례화된 상징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작동 원리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권헌익·정병호, 2013:96). 프랑스 정치인류학자 발렁디에(Georges Balandier)가 말하는 무대권력(scene politics)과 연극정치(theatrocracy)의 개념도 이와 유사하다. 그에 의하면 “권력이란 의례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의 전환, 이미지의 생산, 상징의 조작과 조직화를 통해서만 창출되고 유지된다”(하상복, 2007:25-27에서 재인용).
아닌 게 아니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근대국가의 형성 및 세계적 확산 과정에서 극장국가의 원리는 활발히 도입되었다. 특히 각국의 수도는 엄청난 변모를 거쳐 국가의례를 공연하는 거대한 공공무대로 변모했다(다카시, 2003:13). 기어츠가 말한 것처럼 수도는 극장국가의 ‘모범적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후발 근대국가 혹은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그랬다. 가령 일본의 경우, 개국 이후 메이지 시대 말까지는 공간적 차원에서 “새로운 표상 시스템이 형성되는 시대”였다(이효덕, 2002). 이런 점에서 메이지 국가는 “전형적인 극장국가”였다(토오루, 1993:9-10, 29). 토오루에 의하면 일본은 과거에도 중국문명에 기초하여 국가경영을 했는데, 그는 일본인에게 “극장국가 국민으로서의 연기본능이 있다”고도 말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출범한 일본의 근대국가는 도쿄를 “국가의 상징적 지형”으로 부상시켰다(다카시, 2003:61). 도쿄는 “눈부시게 새롭게 구성된 황실 패전트의 중심적인 노천무대”로 등장하면서 과거 행재소(行在所)8)에서 제국의 수도로 급변했다(다카시, 2003:36). 물론 그 과정에서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에 의해 수많은 ‘전통의 발명’이 생산되었고, 이러한 ‘기억의 경관’(memoryscape)을 통해 도쿄는 극적인 국가의례를 펼치는 중심무대가 되었다(다카시, 2003:60-130). 일본이 1932년에 건설한 괴뢰국가 만주국도 매우 유사한 양태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만주국은 이벤트의 나라”였다. 만주국은 “일제가 외부세계를 향해 행사는 일종의 연극 같은 것”이었는데, 수도 신징(新京)도 이런 맥락에서 계획되고 건설되었다(한석정, 1999).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로 재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수도계획 프로젝트를 통해 이른바 “돌로 쓰인 단어”를 베를린에 남기고자 했는데, “국가는 국민에게 가능한 거대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의 그가 설정한 목표였다(권형진, 2011). 히틀러는 수도계획과 국가건설을 사실상 동일시한 것이다. 하지만 극장국가는 전통왕조의 유산만도 아니고, 근대국가 건설 초기의 현상만도 아니며, 또한 우파 전체주의 국가의 전유물만도 아니다. 극장국가는 여전히 세계적이고 보편적이다. 가령 사회당 출신 프랑스와 미테랑 대통령이 추구한 국립묘지 “빵테옹의 상징정치”는 극장국가로서의 근대국가를 재현하는 또 하나의 단면이다(하상복, 2007). 만약 북한이 극장국가라면 이는 결코 북한 특유의 현상이 아니다. 극장국가는 어디까지나 정도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우리 시대의 간판급 극장국가로 여길만한 근거는 충분히 많다.
북한의 국가권력과 정치체제는 지금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개념화되어 왔다. 사회주의, 전체주의, 수령제, 조합주의, 신유교 가족국가, 유격대국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을 관통하여 북한체제를 특성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론이 바로 극장국가론이다. 최근 북한의 극장국가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헌익·정병호(2013:13-15)에 의하면 “북한 정치체제의 수수께끼는 특이한 개인숭배의 관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행의 특이한 지속성”이다. 말하자면 북한은 카리스마 권력의 비영속성을 극복한 특이한 사례인데, 그 비결이 새로운 국가정치 기술의 발명, 곧 “대중적 사회동원과 대중적 정치교양”이라고 했다.
북한은 “식민지의 고통과 빨치산 투쟁의 기억”을 창조하고 “만주시대에 대한 국가적 서사”를 통해 국가 전체를 극장화 혹은 무대화한다(권헌익·정병호, 2013:43-46). 특히 김일성 사후 북한은 기본적으로 “장례와 추모의 정치”를 강화하고 있다. 극장국가론이 인식하는 북한은 기본적으로 ‘정치지상주의’의 나라인데(권헌익·정병호, 2013:21-23), 이 때 정치의 핵심은 ‘급진적인 도덕정치’이다. “우리 조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입니다. 정치에 비하면 경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이 이를 웅변한다. 말하자면 정치라는 개념이 “지고의 도덕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극장국가와 정치지상주의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이 북한의 경우를 놓고 재확인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메들리코트(Medlicott, 2005) 역시 북한을 기본적으로는 전근대 동아시아 유교국가로 치부한다. “상징적 연출(symbolic performance)이 북한의 국가주권 생산을 매개하는 거대한 층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 또한 “김정일이 연출가이자 디자이너로 있는 북조선의 유격대국가는 바로 기어츠가 규정한 ‘극장국가’의 성격을 분명히 부분적으로는 띠고 있다”고 본다(와다, 2002:156). 북한에서는 영도예술이라는 이름의 “통치의 연극화, 통치의 예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북한의 수도 평양이 있다. 북한은 대표적인 극장국가이며, 평양은 극장국가의 핵심적 무대공간이다.
Ⅲ. 북한의 건축 ㆍ 도시 ㆍ 수도 계획 원리
1. 건축 계획
북한에서 건축은 “사람의 생활과 활동에 필요한 정신적 및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여주는 수단”이며(백과사전출판사, 1995:548; 김정일, 1992:3), “실용성과 사상예술성”을 건축의 본질적 속성으로 규정한다(김정일, 1992:11). 곧, 기능성, 안전성 등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건축의 기능 외에도 사상 교양적 역할이 강조된다.
특히 기념구조물, 장식구조물, 선전구조물과 같은 ‘건축구조물’은 “조형적 처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교양하며 예술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인민의 사상교육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된다. 수령의 혁명위업을 칭송하는 대기념비는 도시의 중심축에 주변 건축물보다 크고 웅장하게 건설함으로써, 그곳에 담긴 사상적 위대성과 심오함을 직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한다. 또 수령의 동상은 인민들이 언제나 바라 볼 수 있도록 중심부의 가장 높은 곳에 조성하도록 하고 있다(김정일, 1992:38-45). 조각과 벽화, 장식, 공예 등도 건축의 사상예술성을 높이고 체제의 우월성과 수령의 원대함을 강조하는데 사용된다. 조각과 회화의 경우, 형태, 색채, 명암 등을 통하여 상세한 묘사가 가능하여 인민들에게 사상적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김정일, 1992:100-102).
1970년대부터 북한 건축은 ‘주체건축’을 추구하는데, 이는 인민대중의 요구와 지향을 완전무결하게 실현해주는 것으로 “가장 혁명적이고 인민적인 건축”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축의 본보기”(백과사전출판사, 1995:550)이다. 주체건축의 강조는 기능주의, 구조주의, 표현주의 건축의 배격으로 이어진다. 기능주의 건축은 건축의 기능만을 절대화하여 그것이 지녀야할 사상예술성의 중요성을 간과하며, 구조주의는 재료와 구조로 다양성을 강조하여 자본주의 건축의 반동성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표현주의 건축은 퇴폐적이고 말세적인 미적 취미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이들은 모두 주체건축의 조건인 민족성과 사상예술성을 모두 부정하는 “반인민적이며 반동적” 행위인 것이다(백과사전출판사, 1995:559; 김정일, 1992:24-25).
이에 북한 사회 내에서 건축가9)는 강한 정치적 권력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인민대중 중심의 주체건축을 성공적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곧 수령의 구상과 의도가 담긴 ‘혁명적 수령관’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축가는 “수령이 펼쳐준 구상을 실현해나가는 기술자이며 창작가”에 불과하며, 건축 계획과 설계는 당의 의지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전문건”과 같다. 때문에 북의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당 정책을 깊이 체득하는 것”이다(김정일, 1992:17, 151, 156, 158-159). 건축가는 끊임없이 수령의 사상의식을 체득할 때 비로소 훌륭한 혁명적 건축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은 ‘건축가동맹’이라는 건축가들의 사상적 교양을 담당하는 조직을 두고 있다. 건축가동맹은 기본적으로 토론회, 강습회, 견학 등 건축가 및 건설기술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국가적 건축 사업의 설계현상모집사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건축가동맹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건축가들에게 당의 건축창작방침과 건축 사상이론을 학습시키는 것이다. 결국 북한의 건축은 수령에 의해 기획되고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도시 계획
북한에서 도시란 “농업토지와 직접 관계하지 않는 사람들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주민지”를 의미한다. 곧, 북한은 생산수단으로서 토지의 이용 여부를 도시와 농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북한의 도시는 기능에 따라 생산도시(공업도시, 채굴광업도시, 수산도시, 임업도시), 소비도시(행정문화도시, 과학도시, 군사도시, 관광도시, 요양도시 및 휴양도시, 살림집도시), 상업 및 교통도시(무역도시, 교통도시 등)로 나뉜다. 규모에 따라서는 대도시(50-100만, 20만 명-50만명), 중도시(10만 명-20만 명, 5만 명-10만명), 소도시(1만 명-5만 명, 1만명 이하)로 구분된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56-257).
한편, 북한의 도시 계획은 도시계획법10)에 준하여 작성된다. 법에 따르면 도시계획은 ‘도시와 마을계획영역의 토지를 이용하여 건물, 시설물, 녹지 같은 것을 건설, 개건, 정비하는 것과 관련하여 통일적이며 종합적인 계획’(도시계획법 제2조)으로, 도시건설계획이라고도 한다. 도시의 규모나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총계획, 세부계획, 순차및연차 건설계획, 구획설계로 구성된다. 상위계획인 도시총계획은 20년 장기종합발전계획이며, 세부계획은 도시용도별 지역이나 특정 구역을 단위로 도시총계획의 내용을 구체화한 것으로, 해당 지역에 대하여 건축, 도로교통, 상․하수도, 전기 체신망 등 부문별 세부계획이 이에 해당한다.
북한의 도시계획은 공간계획을 넘어 사회계획에 가깝다. 도시는 사회제도적 특성, 국가의 과학기술 및 문화예술의 발전정도를 종합적이고 집중적으로 담아내는 발현체(백과사전출판사, 1998:258)이며11), 도시건설은 “사상과 이념에 관한 문제”(김정일, 1995:61)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기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설구상과 건설방침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계획되어야 한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58-259). 그리고 계획의 핵심은 “사회주의 도시의 경치”가 가장 잘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66).
이를 위해 도시 중심부는 가장 심혈을 기울여 건설해야하는 공간이다. 공간 구조상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며, 도시 전체의 기본 축이 된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도시 중심부의 가장 좋은 자리에는 김일성 동상을 세우고, 그 주변에 광장, 공원, 조형예술작품 등을 건설하여 강력한 이념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한다(백과사전출판사, 1995:559). 또한 중심부를 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하기 위하여 강, 바다, 구릉, 녹지와 같은 자연 지리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67).
도시중심부는 북한 체제의 사상적 상징성을 드러내는 공간임과 동시에 혁명적 수령관을 배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도심부가 주로 상업, 업무, 서비스 등의 용도로 압축적이고 집약적으로 이용되는 것과는 달리, 북한 도시 중심부는 김일성 동상을 중심으로 박물관, 문화회관, 극장 등 거대한 규모의 공공문화시설과 군중집회, 경축야회 등 각종 국가 행사가 개최되는 중앙광장이 위치한다. 이는 인민의 사회정치생활과 문화생활을 도시 중심에 집중시켜 효율적으로 수령의 위대성을 체득하고 사상과 정서 교양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고안된 것이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도시의 중심부와 경치 좋은 곳에 권력기관 건물을 세우고 유흥장을 꾸리며 호화주택을 건설하고 거리마다 초고층 건물을 빼곡히 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시건설방식이 “반동적이며 반인민적인 정치제도의 산물”이라면, 사회주의 국가의 도심부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고 흥청거리게 하며 인민의 기쁨과 행복이 차 넘치게” 계획된 것이라고 설명한다(김정일, 1992:9-10).
한편, 북한은 ‘도시경영’을 전국가적·전사회적 사업으로 강조한다. 도시계획 혹은 도시건설이 도시의 건물과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도시경영은 주택, 공공건물, 유원지, 교통시설 등을 정기적으로 관리·보수하는 사업이다. 북한은 도시계획법이 제정된 2003년보다 훨씬 앞선 1992년에 이미 도시경영법을 채택하였으며, 도시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주민들의 중요 임무 중 하나이다. 주민들이 직접 혁명사적지와 혁명전적지를 정중히 꾸리고 깨끗하게 관리함으로써, 스스로 애국정신을 강화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은 4월과 10월을 도시미화월간으로, 매달 첫 번째 일요일을 도시미화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2013년에는 ‘도시미화법’을 별도로 제정하여, 도시 환경미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연합뉴스, 2013년 05월 15일).
3. 수도 계획
평양은 해방 직후 북한의 임시 수도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거의 초토화되었다. 평양시청사, 평양2백화점 등 대형건물들은 벽체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고 중앙광장, 스탈린거리, 모택동거리 등 평양 도심부의 황폐는 극심하였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8,700여개의 공장, 기업소, 60여만 호의 살림집, 5,000여개소의 학교, 1,000여개소의 병원과 진료소, 260여개소의 극장과 영화관, 670여개소의 과학연구기관 및 도서관, 수천개소의 문화후생시설들 등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결국 전쟁으로 인해 평양의 도시 조직과 경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리화선, 1993a:329; 장세훈, 2005:229-230).12)
폐허가 된 평양을 복구하는 것은 북한에게 매우 시급한 사안이었다. 김일성은 1951년 1월 21일 평양 복구의 기본 방향에 대한 연설을 통해, 이전의 낡고 퇴폐한 도시 건설방식을 배격하고 “민주수도 평양을 전쟁전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웅장하고 현대적으로” 건설하고자 했다(김일성, 1980a:278). 그리고 평양의 복구개건사업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1951년 12월 도시건설성을 설치하였고, ‘평양시복구건설총계획도’를 작성하였다. 전쟁 이후에는 보다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도시 ‘평양’ 재건에 돌입하여, 김일성은 1953년 7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평양시 복구 총계획에 대하여’를 결정하고, 평양시 복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도시의 모든 과거가 사라져버린 평양은 이상적 사회주의 도시로 재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소련 및 동구권에서 유학한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이 평양 재건을 주도하면서, 사회주의 도시계획 원칙들은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모스크바 건축대학에서 공부한 건축가 김정희(1921-1975)가 제시한 ‘평양 마스터플랜’(1953년)은 사회주의 도시계획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13). 오늘날 평양은 바로 이 계획에 의해 형성된 도시 기반을 토대로 이후 추진된 각종 도시개발이 혼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임동우, 2011:127).14)
평양시총계획, 평양 마스터플랜 등과 같은 국가계획을 비롯하여 이후 발표된 수많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현지 교시들에서 발견되는 평양의 수도계획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북한 전 국토의 상징이며, 북한의 사상과 이념 체계의 응축물로서 평양 건설이다. 도시가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적 면모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 라면, 수도는 “그 나라의 모든 것을 특징짓는 얼굴”과 같은 것이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59). 평양은 “조선인민의 심장이며, 사회주의 조국의 수도이며, 우리 혁명의 발원지”(김일성, 1981:622)로서 당의 주체적 건축사상이 철저하게 구현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북한은 평양중심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계획하여 체제의 우월성을 부각하고 혁명적 수령관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공간으로 건설하였다. 인민들의 군중집회와 시위, 열병식과 경축야회 등을 진행할 수 있는 도심부 상징광장과 수령관을 담아내는 기념비적 공공건물, 이를 중심으로 넓게 뻗어나가는 주요 간선 거리와 고층 살림집 등은 수도를 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게하며 인민 수도로서 면모를 과시하도록 계획되었다(백과사전출판사, 1998:267-268).
수도 평양 건설은 대외적으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일제 강점기 평양은 사회주의 사회의 이념에 맞지 않는 “기형적이며 비문화적”(리화선, 1993a:341)이었기에, 전후 평양 복구 방향은 이전의 낡고 퇴폐한 도시 건설방식을 배격하고 “전쟁전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웅장하고 현대적으로” 건설되어야 했다(김일성, 1980a:278). “조국의 얼굴”인 평양을 잘 건설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혁명의 수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김정일, 1995:60-61). 특히 ‘설계의 표준화’, ‘건설의 기계화’ 등을 통하여, 수도 건설의 속도를 높임으로써 평양을 잿더미로 만든 미국에게 북한 체제의 승리를 보여주고자 했다(김일성, 1980a:276; 김정일, 1995:59).15) 곧, 평양 건설은 김일성 조국의 존엄, 사회주의 조선의 권위와 이어지는 중요한 정치적 문제였다(노동신문, 2011년 08월 11일).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지속된 극심한 경제 침체 속에서도 전시(展示) 도시로서 평양 가꾸기에 몰두하였다. 1998년에는 ‘수도평양시관리법’을 지정함으로써 평양시 관리를 위한 투자를 확대하고 전체 인민들로 하여금 평양시 관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2002년부터는 ‘21세기형 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시 개건·현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평양시 도심 지역의 주요 거리의 포장, 건물 외벽, 가로등 등을 교체하고 대규모 건축물을 보수하는 등 평양 미관 개선이 주된 사업 내용이다. 김정일은 이어 2012년 김일성 생일 100주년을 맞아 평양 내 10만세대 살림집 건설을 목표로 세우고 내각 소속 수도건설부를 국방위원회 산하 수도건설사령부로 승격시켰다. 후계자 김정은은 2012년 04월 수도건설위원회를 신설하고 부총리급 위원장을 선임하였다. 또한 2014년 신년사에서 강성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16) 군민협동작전으로 평양시 건설에 총력을 다해야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끊임없는 평양 단장 프로젝트는 권력 이양을 가속화하면서 3대 세습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왕조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Ⅳ. 수도 평양의 공간구조(Spatial Structure)
1. 평양의 가로 및 경관
서울이 강남, 잠실, 목동 등 특정 지구를 중심으로 개발된 것과 달리, 평양의 도시화는 주요 거리가 개선되고 확장하면서 주변지역이 하나의 새로운 구역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임동우, 2011:103). 건축물을 거리를 중심으로 일정 구역 안에 집단적으로 배치하여 통일되면서도 웅장한 사회주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도시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북한에서 ‘거리’는 가장 우선해야 할 설계요소이며, 이러한 선적(線的) 개발은 건설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집중함으로써 체제의 우월성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선전하는데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평양의 거리들은 거리의 형성 연대, 거리가 위치한 자연·지리적 조건, 거리에 부여된 기능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설계 및 계획 수법들이 적용되었다. 전후 실시된 초기 가로들은 주로 4-6층의 살림집 건물들이 길을 따라 건설되고, 살림집 아래층에는 다양한 편의봉사시설들을 배치하여 연속성을 주었다. 그러나 1950년대~1960년대에 건설된 거리들은 건물들을 거리에 사선 혹은 직각이 되게 배치하는 등 단조로움에서 탈피하고자 시도하였다(리화선, 1993a:345-348). 1960년대 이후에는 건축물의 높이와 규모, 지붕의 형태 등이 서로 다른 건물들을 적극적으로 혼합하여 배치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인 거리 경관을 창출했다.
평양의 거리 확장은 1970년대~1980년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많은 거리들이 이 시기 건설되었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큰 구역을 포괄하면서 형성되었다. ㅅ자형, 톱날형, ㅜ자형 등 다양한 평면을 지닌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이들을 들쭉날쭉 배치하는 것을 넘어 한 개의 건물을 여러번 꺾어 전개함으로써 가로를 보다 입체적이고 웅장해 보이도록 하였다. 지형을 이용하여 변화감을 주기도 하였는데, 저지대에 중저층 건물을, 고지대에 고층건물을 배치하여 건축적 대조를 극대화하기도 하였다. 이는 남한의 가로 설계가 고지대에 저층건물을, 저지대에는 고층건물을 건설하여 자연경관을 보전하고 위화감을 조장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김신원, 2007:185-186; 리화선, 1993b:163-170).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를 맞아 건설된 천리마거리는 1단계 공사에서 1,000세대의 낡은 집들을 허물고 6,060세대의 새로운 살림집을 건설하였다. 이들 살림집은 8~15층의 현대식 살림집으로 상점, 양복점, 식당, 꽃방, 사진관 등의 봉사시설을 다층 살림집 아래층에 두었다. 거리의 서쪽 면은 보통강 기슭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공공건물을 여유롭게 배치한 반면, 동쪽 면은 8~10층의 살림집을 병렬로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12층, 15층 살림집을 두어 높낮이의 변화를 두었다(김기호, 2006:224-226; 리화선, 1993b:45-46).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선포한 노동당 제6차 대회에 맞춰 1980년에 건설된 창광거리는 평양역에서 보통문에 이르는 북한 최대 번화 거리이다. 김정일은 창광거리 건설을 “건설부문에서 새로운 변혁을 가져오는 시발점”이자 “설계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기존 틀과 낡은 기준을 대담하게 깨고 도시건설에서 비약과 변혁을 일으키는 전환점”으로 삼고자 하였다(리화선, 1993b:175). 실제 창광거리는 이전에 비해 대담하고 현대적인 특성을 보인다. 18층~30층에 이르는 고층의 살림집들은 다채로운 형태와 색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매스와 층수의 건물들을 혼합하여 배치함으로써 입체감과 변화감을 형성하고 있다. 또 고층건물을 집합하여 배치함으로써, 거리를 보다 웅장해보이도록 하였다. 현재, 창광거리에는 15~40층의 고층아파트 30여동과 더불어 쌍탑 형태의 고려호텔, 평양역전백화점, 락원백화점, 창광원, 고려항공 본점 등 다양한 소비시설이 위치하고 있다. 특히 고려호텔 앞에는 30여개의 음식점이 밀집하여 ‘창광음식점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2009년 한 해 동안 ‘평양시 개건 현대화사업’의 일환으로 창광음식점 거리는 현대적 주방설비 설치, 외장재, 간판, 조명 등 교체, 보도블록 포장 등의 개건보수공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문수거리는 대동강구역 문수네거리로부터 문수무궤도전차 주차장까지 3㎢에 이르는 구역으로, 창광거리 제1단계 공사가 끝난 뒤인 1980년 11월부터 조성되었다. 1만 7천여세대의 주택들과 거리 주변으로 청년중앙회관, 동평양대극장, 대성백화점 등의 상업·편의 시설들이 들어서있으며, 인근에 위치한 만수대대기념비, 주체사상탑, 당찬건기념탑 등 기념비적 건축물과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거리를 따라 크게 8개 구획으로 분할되는데 그 중 6개 구획은 살림집 위주로, 북쪽의 2개 구획은 현대적 유희시설들을 갖춘 공원과 주차장으로 분리된다. 살림집의 기본 층수는 10~12층인데, 8, 9, 15, 18층의 각각 다른 형태의 고층 살림집을 적절히 혼합하여 배치함으로써 다양성과 화려함을 보장하였다. 문수거리는 창광거리 건설경험을 새롭게 창조하여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리화선, 1993b:179).
이어 북한은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을 앞두고 광복거리를 건설하여 2만 5천 가구의 아파트를 신축하였고, 김일성 80회 생일인 1992년 4월과 전승절 40주년인 1993년에 통일거리 1, 2단계 사업을 완공하였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을 한동안 중단하였으나, 2012년 김정일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을 맞아 평양 중심부의 만수대거리와 창전거리 재개발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만성적인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2012년 강성대국 건설에 따른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건설 공사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전후 복구시기에 건설된 4층짜리 낡은 살림집이 밀집해있던 만수대거리는 6~18층의 살림집이 건설되었으며, 창전거리에는 평양에서 가장 높은 45층 건물 등 타원형과 원형의 초고층의 살림집 14동과 백화점, 이발소 등의 편의시설과 유치원, 학교 등 교육시설들이 새로 들어섰다. 조선혁명박물관, 만수대의사당, 천리마동상, 옥류관 등으로 둘러싸인 창전거리는 북한의 핵심지역으로 중앙당 간부, 예술단원, 부유층 등 일부 특권층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다(동아일보, 2013년 08월 29일).
2. 평양의 건축 및 조형물
북한의 도시를 대표하는 평양은 혁명의 중심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북한은 평양을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고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데 평양의 건설은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문화도시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자연보호 및 무공해 대책을 수립, 인민생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문화시설 건설에 주력하였다.
해방 당시 평양의 공공건물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에 소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인 신고전주의 양식을 적극 수용하여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종합병원 등을 비롯한 각종 학교, 극장, 병원, 호텔 등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곧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등장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탈피하고자 하였고, 소련의 신고전주의 양식은 당시 조선민중들에게는 낯선 유럽 문화양식이었으며, 조선민중을 억압했던 식민지 시대의 지배기구 건축물에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심리적으로 경계되는 면도 있었다(송승섭, 2003:130-131). 이에 김일성은 전후복구 3개년 계획 시기 여러 연설 등을 통하여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부여해야한다’고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
“설계에서 선진적인 건축학이 요구하는 것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건축에서 사회주의적 내용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민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건축물들이 근로인민의 요구에 적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김일성, 1980a:38-39)
1950년대 초반 활발했던 기술전문직의 동구권 국가로의 유학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 전면 중단되었다. 또한 이미 유학을 다녀온 대다수의 기술 관료들은 반당·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숙청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민족적 형식에 민족전통양식과 사회주의 신념과 의지를 표현한 건축을 평양 곳곳에서 실현한다. 1960년 완공된 평양대극장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극장 건물로 북한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현대 조선식 건물의 하나”로 설명한다(리화선, 1993a:394). 대동강 강기슭 절벽에 위치한 옥류관은 절벽에 의지하여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조선식의 건물이 놓여있다(리화선, 1993a:401-402).
또한 전후복구가 한창인 이 시기 북한은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을 추모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 발전의 열망을 반영하는 조형물도 건립한다. 인민군 열사탑, 우의탑, 천리마 동상 등이 그것이다. 1961년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에 맞춰 제막되었다.17)
북한은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 사회주의 도시화 노선과 북한 현실간의 조화를 꾀하려 노력하였다면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우리식’으로 도시 공간을 건설하겠다는 정책적 의도가 부각되었다. 김일성광장 북쪽에는 또 다른 작은 규모의 광장이 조성되었고 작은 광장 서쪽에는 만수대 예술극장(1976년)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북한은 1967년 이후 많은 변화를 겪는다. 제4기 15차 전원회의 이후 갑산파가 숙청되면서 김일성과 김일성 후계문제를 반대할 수 있는 정치 세력들이 모두 제거되었고, 당은 유일사상체계를 더욱 철저히 확립하고자 하였다. 북한은 이를 위하여 체제 강화용 대기념비와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를 전국에 대량으로 건설한다.18)
1972년 김일성 60세 생일을 기념하여 건립된 만수대 대기념비는 전례없는 규모와 폭을 가진 기념 건축이다. 만수대 대기념비의 중심에는 20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규모를 자랑하는 김일성 동상이, 동상의 왼쪽에는 항일혁명 투쟁상,19) 오른쪽에는 사회주의혁명 건설상이20) 세워졌다. 동상의 뒤편에는 조선혁명역사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백두산 천지 모습의 대규모 모자이크 벽화가 장식되어있다. 2011년 김정일 사후, 북한은 만수대 대기념비에 김일성 동상과 같은 크기의 김정일 동상을 세워 현재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21)
한편, 건축에 양식에 있어서 전통건축요소를 직접적으로 수용하던 60년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전통요소를 현대화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안창모, 2012:138). 북한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의 개념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면서, 민족적 건축양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반영한 기존의 건축 양식에서 민족적 특성과 현대성을 결합하고 실용성과 현대적 건축미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북한의 도시 건설은 1980년대 초부터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평양, 신의주 청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신도시 건설에 적극 나섰지만 평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 대도시에서는 중앙의 지원 부족, 자재 및 인력 부족 등으로 신도시 건설을 마무리하기 어려웠다(장세훈, 2004:301-302).
북한은 1980년대 후계자 김정일은 후계자로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1989년 세계학생청년축전을 대비해 1980년대 평양을 예술성을 갖춘 대규모의 건축물과 기념비를 대거 건립하였다.22)
북한은 수도 평양의 중심부를 대중적인 정치·문화적 행사가 일어나 항상 사람들이 흥성거리는 인민적인 중심부로 형성하고자 하였는데23), 인민대학습당의 건립을 통하여 마침내 수도 평양의 중심부가 완성되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1980년대 당시 민족건축형식에서 탈피하여 국제적 경향성을 따르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안창모, 2012:139). 특히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를 전후로 현대적 건축미를 중시하는 공공건물들이 많이 건립되었다. ‘청년중앙회관’이나 ‘동평양대극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1980년대 이후 북한은 어려운 정치·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건축물들을 축조한 것은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욕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최악의 경제난을 겪으면서 유경호텔처럼 진행되던 대규모 공사들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국가의 대규모 건설이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유경호텔 공사가 재개된 것은 물론 2012년 강성대국 건설에 맞춰 평양 10만호 주택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재원조달과 자재 부족으로 평양의 중심거리에 집중되면서 창전거리에는 최고 44층 규모 초고층아파트 14개동이 완공되었으나 변두리 지역은 공사비 부족으로 중단된 곳이 많다. 24)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북한은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사적소유의 범위가 늘어나고, 주민 간 주택 사용권 거래가 시작되면서 노후화된 평양의 아파트들이 리모델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리모델링된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비싸게 거래되면서25) 부유층 들을 사이에서 주택 리모델링 붐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김정은은 최근 평양역, 순안공항 현대화공사를 지시하였고26) 중국과 합작을 통해 동평양상업거리를 착공하였다.27) 이렇게 김정은은 평양의 대규모 건설을 주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존재감과 위상을 높여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Ⅴ. 수도 평양의 공간행태(Spatial Behavior)
1. 정례 행사
태양절은 김일성의 생일(4월 15일)을 기념하는 북한의 최대 명절이다. 축하행사는 수도 평양에서 집중적으로 개최된다. 평양미술축전, 김일성화전시회, 우표전시회, 만경대상 체육축전, 조선인민군 청년군인 웅변대회, 국가도서전람회, 만경대상 국제마라톤대회와 전국청소년 만경대 고향집 찾기 행군 등이 그것이다. 김일성 광장에서는 청춘남녀가 정장을 하고 춤을 추는 대규모 무도회가 열리고 불꽃놀이도 진행된다.28) 이 기간에 진행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은 평양 전역에서 진행된다. 인민들은 이 축전 기간 동안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아리랑축전은 북한이 지금까지 개최한 국가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상징적 국가공연이다. 2002년 4월 15일 태양절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아리랑 공연은 10만 명의 공연자, 2만 명의 배경대(카드섹션),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참석하는데29) 2002년 처음 개최된 이후 2006년 홍수로 인해 행사가 취소된 것을 제외하고는 2013년 현재까지 거의 매년 개최되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북한주민들의 대부분이 이 공연에 참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30)
2010년 10월 9일 당창건 기념일 전야제에 개최된 아리랑 공연에서는 당시 후계자 인 김정은이 김정일과 함께 주석단에 자리하여 대중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김정은을 대규모 국가의례를 통해 드러나게 함으로써 후계자를 확인시켜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평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김일성 광장에서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연중 거행된다. 대규모 퍼레이드는 태양절, 당 창건기념일, 전승기념일 등 연례적인 국가 행사 외에도 김일성과 김정일 장례식, 미사일 발사, 인공위성 발사 성공 시에도 진행하고 있다. 곧 평양의 중심부인 김일성 광장에서는 연중 수많은 기념행사와 대규모 퍼레이드, 축전 등이 열리고 있으며 이는 방송을 통해서도 전국적으로 전파된다.
이와 같이 평양의 중심부 김일성 광장에서는 대규모 국가의례 및 행사가 자주 열리고 있고 인민들은 그 상징적 국가의례 행사에 주인공 또는 관객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상징적 국가의례 행사는 수령과 국가, 민족과 인민들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믿음체계를 내면화하는 기능을 한다. 인민들은 극장국가의 상징적 공연에 배우와 관객으로 직접 참여하는 화려한 경험과 그것과는 현격하게 대비되는 어려운 일상생활을 ‘공적-사적 영역’과 ‘공식-비공식’ 상황으로 구획화하는 행동패턴을 익히게 되어, 생활의 어려움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별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정병호, 2010:34).
2. 비정례 행사
김일성 광장, 만수대 언덕 등 평양의 중심부에서는 연중 정치적 기념일들에 대규모 정치행사들이 진행된다. 하지만 평양의 중심 광장에서는 정해진 행사들만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평양의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행사들도 상시적으로 열리고 있다.
2014년 1월 6일 김일성 광장에서는 여러 간부들은 물론 시민 수만 명이 모여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신년사 과업관철 군중대회는 평양을 시작으로 도·시·군별로 광장에서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광장 뿐 아니라 4.25문화회관 등 평양의 주요시설에서도 개최되었다.
김일성 광장에서는 문화적 일상적 행사들도 진행되는데 2013년 3월 16일 김일성광장에서는 “전시가요대열합창경연대회”가 열렸다.31) 그 외 광장에서는 항상 북한 주민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추석과 설과 같은 민속 명절에 김일성 광장에서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게다가 김일성광장에서는 많은 행사가 열리는 것은 물론 행사 준비를 위한 연습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도시의 중심부 광장의 역할이 주민들의 정치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여 궁극적으로는 정치사회화의 적극적인 도구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평양의 주요 광장을 비롯한 도시 중심부는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일상생활
평양시민은 ‘혁명의 수도에서 사는 특별하게 배려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이주철, 2003:106). 북한은 전쟁 이후 지속적으로 인민들에 대한 성분조사를 실시하였고 1997년에는 공민등록법을 채택 평양시민증을 발급하였는데 이는 평양시민과 지방주민을 구분, 수도 평양으로의 인구유입을 막는 것이다.
이와 함께 평양 시민들은 일반적인 북한 주민의 일상 외에 추가적인 일과들이 부여된다(이우영, 2013:44). 북한의 모든 주민들이 하는 ‘정성작업’은 우상화시설이 집중 건설되어있는 평양 시민들에게는 더 많이 부여되는 일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평양은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연일 각종행사가 진행된다. 평양시민들은 보통 한주에 한번정도는 이러한 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지방 사람들보다 평양시민들에게 더 많이 부여되는 것들이다. 평양시민들은 정치행사에 상시적으로 참석해야하기 때문에 가정에는 행사참가용 부채, 지화꽃다발, 기발 등이 구비되었다.
이렇게 평양시민은 일반 주민과는 다른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은 물론 연중 평양시 전역에서 열리는 다양한 군중대회 및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 정치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시민들의 다양한 행사의 빈번한 참여는 정권과의 통합 또는 주민들 간의 통합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이우영, 2013:47). 이는 곧 의례를 통한 사회적 통제가 다른 지역의 주민들보다 평양시 주민들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Ⅵ. 결론
북한은 정권 수립기보다 1950년 전쟁 후 수도 평양의 도시건설에 집중하였다.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국가를 정상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수도의 ‘상징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북한은 전후 복구과정 초기,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지원으로 세워진 ‘민족성’이 포함되지 않은 건축과 도시 계획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도시건설과 건축에 있어서 ‘민족적 형식’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수도계획과 도시계획에 있어서도 이데올로기, 즉 ‘사상성’을 중시하는 북한은 1970년대 이후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주체사상’으로 변화하면서 수도 평양의 도시 계획에도 ‘주체건축론’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정책실패와 국내외 정세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시작되었고, 정치적으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후계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수도 평양은 엄청난 규모의 광장과 육중한 공공건물 등을 건립하면서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강화해 나갔다. 1980년대 이후 북한은 수도 평양의 도시건설의 양적 확충과 함께 대규모 국가의례가 눈에 띄게 많아지고 화려해진 것이다.
이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기존의 지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서 수도 평양이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를 제고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난의 지속과 특히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한 위기의 가중은 북한으로 하여금 극장국가적 성격을 보다 크게 부각하도록 만들었다. 2002년에 시작된 아리랑 공연, 비정기적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와 집체 시위의 증가,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이들의 빈번한 대외 노출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1980년대 후계자 김정일의 등장 시기에는 대규모의 기념비 건축 사업이, 또한 김일성 사망이후에는 대규모 국가의례의 동원이 두드러졌던 것처럼,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이 진행 중인 현재의 상황에서 북한은 유훈통치의 미명 하에 극장국가의 면모를 더욱 더 심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그 과정에서 평양은 핵심적 무대공간으로서 특별히 치장되고 관리될 공산이 더욱 더 높아 보인다. 하지만 북한 전역의 심각한 피폐화와 무관하게 수도계획에 몰두한다는 점 자체가 목하 북한체제의 구조적 위기를 방증하는지도 모른다.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2013)이 말한 것처럼, 근대화와 세계화의 대세 속에 오래전부터 일본 도쿄는 Tokyo로, 그리고 한국의 서울도 언제부턴가 Seoul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작금의 평양은 여전히 전근대 왕조 시대의 ‘평양성’(平壤城)에 더 가깝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12년 통일학 · 평화학 연구기금으로 수행된 것임.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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