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rent Issue

Journal of Korea Planning Association - Vol. 59 , No. 1

[ Article ]
Journal of Korea Planning Association - Vol. 55, No. 7, pp. 73-87
Abbreviation: J. of Korea Plan. Assoc.
ISSN: 1226-7147 (Print) 2383-9171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1 Dec 2020
Final publication date 05 Oct 2020
Received 01 Jul 2020 Reviewed 28 Aug 2020 Accepted 28 Aug 2020 Revised 05 Oct 2020
DOI: https://doi.org/10.17208/jkpa.2020.12.55.7.73

한국은 어떻게 자조주택을 변용했는가? : 완성주택 공급과 주택금융 도입을 중심으로
김태오**

How Korea Has Transformed Self-help Housing into Completed Housing?
Kim, Tae Oh**
**BK Post-Doc., Graduate School of Urban Studies, Hanyang University (stct3090@naver.com)
Correspondence to : **BK Post-Doc., Graduate School of Urban Studies, Hanyang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stct3090@naver.com)

Funding Information ▼

Abstract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ways in which self-help housing was introduced in Korea, its reasons for not having an impact in the country, and the background for its transformation into completed housing provided with housing financing in “The Secondary Cities Regional Project in Korea”, which was a part of the World Bank’s Sites and Services Project in the 1970s. According to this study, self-help housing in Korea was introduced in the Miari Assimilation Project, whose mechanism was similar to other international self-help housing projects. The Miari Assimilation Project, however, was a failure due to hasty construction and a lack of administrative capability, and self-help housing, which is constructed gradually in accordance with residents’ labor force and economic circumstances, was subsequently replaced by completed housing provided by the government. Meanwhile, in 1957, when the construction of the Miari Assimilation Project commenced, the media reported the government’s announcement to provide housing financing to build self-help housing, which has been linked with housing financing since the moment it was introduced. Although it became difficult to find self-help housing after this failure, housing financing was continuously used in other housing construction projects. Finally, although there were some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period or project details, self-help housing in Korea in the 1960s was transformed such that completed housing was provided by the government and residents repaid the cost afterward. Although this transformation weakened the ideological nature of self-help housing, which emphasized residents’ autonomy, it laid a foundation for the Korean transformation of self-help housing, which is also observed in the Secondary Cities Regional Project.


Keywords: Urban Planning History, Self-help Housing, Miari Assimilation Project, Housing Finance, Republic of Korea
키워드: 도시계획사, 자조주택, 미아리 난민정착사업, 주택금융, 대한민국

Ⅰ. 서 론

1939년, 푸에르토리코는 개발도상국 중 최초로 자조주택(自助住宅, self-help housing) 이론을 주택정책에 반영하였다. 이후, 페루를 중심으로 한 존 터너(John Turner)의 시험이 알려지며 자조주택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Crane, 1944; Harris, 1998). 여기서 자조주택이란 입주자가 그들의 선택에 따라 자주적으로, 그리고 경제적 여건에 따라 점진적으로 건립하는 주택을 뜻하는데, 저소득층 주택문제 해소 방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토지, 기반시설, 주택 공급을 모두 공공이 부담하는 공공임대주택 공급방식과 비교했을 때, 자조주택에 기반한 방식은 주택문제에 대한 입주자의 자주성(autonomy)을 강조하며 전술한 세 가지 요소 중 주택을 입주자의 몫으로 분리했고, 이를 통해 공공의 재정적 부담을 크게 경감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대신 공공은 건축기술 교육, 기반시설 건립 등을 통해 입주자의 자조주택 건립을 지원하기도 했다(Turner, 1976; Nientied and Van der Linden, 1988; Pugh, 1991; Harris, 2003; UN Habitat, 2003:124-125, 130; 최막중·최봄이, 2017; 김태오·최막중, 2017). 이와 같은 특징은 선진국 대비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마침내 1970년,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은 현지개량과 더불어 자조주택 건립을 개발도상국 주택문제 해소를 위한 주요 방안으로 채택하였다. 뒤이어 1972년에는 세계은행의 주도로 자조주택에 기반한 첫 부지와 서비스 사업(site and services project)이 세네갈에서 착공되며 이의 국제적 확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United Nations, 1971:65-67; Laquian, 1976; 하성규, 2010:427).

이처럼 국제사회가 개발도상국 주택문제에 대응하고자 그 방안을 모색하고 시험하고 있던 시기, 우리나라도 동일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방 이후 급격한 재외교포 유입,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주택소실, 뒤이은 전후복구와 도시화 과정에서의 인구집중은 우리나라의 주택문제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의 주택부족률은 44.0%에 달하였고(서울특별시, 1952),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12월에도 36.5%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었다(서울특별시, 1959).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에게는 이를 해결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기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원조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 원조를 통해 자조주택 이론을 국가 주택정책에 반영한 푸에르토리코1)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미국에 의해 자조주택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1950년대 시행된 난민정착사업은 입주자의 노동력에 기반한 자조주택 건립과 입주자의 자주성에 기반한 자활 프로그램 운영을 중심으로 추진·운영되었는데, 이는 미국 원조를 통해 자조주택 이론이 국내에 도입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조주택 관련 사업은 난민정착사업 이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고, 사업 자체도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정은경, 2015; 김아람, 2017a; 2017b; 황윤희, 2018).

미국 원조가 아닌 1950년대 정부 주도의 주택 건설에서도 자조주택과 관련한 사항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당시 대한주택영단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직접투자를 통해 재건주택, 복구주택, 외인주택 등을 건립(한국주택은행, 1975:89-91)하였는데, 이는 입주자에 의한 점진적 주택건립이라는 자조주택의 정의와 상충한다. 1957년 이후에는 금융지원 중심으로 정부의 주택정책 기조가 전환되었는데, 이 역시 자조주택과는 거리가 있다. 융자 대상이 주택영단, 지방자치단체, 민간주택건설기업체, 상가주택 건설 희망자로 제한되어 정주 목적의 주택을 건립하고자 하는 개인의 융자신청이 원천적으로 불가했고, 토지확보를 전제로 융자신청을 받았기에 저소득층의 수혜 가능성 또한 낮았기 때문이다(신철, 1960; 임서환, 2005:19-29). 이에 따라 1960년대 주택정책은 완성된 표준주택 공급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여타 개발도상국의 자조주택 관련 사업과는 그 차이가 컸다(임서환, 2005:57). 하지만 1950년대에 관련 이론이 국내에 도입되었고, 이후 사업까지 시행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에,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난민정착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던 이유, 나아가 입주자의 자주성에 기반한 자조주택 건립이 활발하지 못했던 이유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한편, 1970년대 세계은행이 차관사업으로 전 세계에서 추진한 부지와 서비스 사업에는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광주권 지역개발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표 1>. 국내에서 중단되었던 자조주택 이론에 기반한 사업이 해외 차관을 통해 다시 추진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최초 사업계획에 타 개발도상국과 같은 자조주택 건립을 원칙으로 한 주택단지 조성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착공 이후 우리 정부의 주장에 의해 자조주택은 완성주택으로 대체되고 말았다(IBRD and IDA, 1974b:7, 9, 11-12; World Bank, 1985:8-10, 63; 건설부 이리지방국토관리청, 1985:12; 김태오·최막중, 2017).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된 사업에서 유독 한국에서만 자조주택 이론이 있는 그대로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자조주택 이론이 적용되지 못한 채, 변용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Table 1. 
Sites and Services Projects supported by the World Bank


이에 본 연구는 다음 두 연구질문의 규명을 목적으로 한다. 첫째, 1950년대 자조주택 이론의 국내 도입 과정과 이후 그 영향력이 크지 못했던 이유의 규명이다. 이와 관련하여 1957년 처음으로 도시 지역에 적용된 난민정착사업을 분석한 정은경(2015)은 ‘자조(自助)’의 강조는 원조사업에 대한 미국의 예산경감이 주된 목적이었고, 더불어 주택문제에 대한 공공의 부담을 민간 영역으로 떠넘기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이후 우리 정부의 주택정책은 자조주택보다 재정적 부담이 큰 완성주택 공급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또한,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을 분석한 황윤희(2018)는 이전까지 이루어진 단순한 주택공급사업과 달리, 해당 사업은 입주자의 자립 능력을 증진시켜 자활 공동체 구현을 목표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그 실패 원인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자조정신이 해당 사업에 적용된 이유를 미국 등 원조 당국의 정책변화에 따른 것으로 설명했을 뿐, 1939년 푸에르토리코 사례로부터 발전되어온 개발도상국의 자조주택 관련 이론을 연구에 반영하지는 못하였다.

둘째, 1970년대 세계은행 차관을 통해 추진된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된 배경의 규명이다. 김태오·최막중(2017)에 의하면,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 자조주택은 정착되지 못한 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완성주택으로 대체된 것이고, 이로 인한 비용상승 문제는 토지 및 주택금융을 통해 해소했다고 주장하였다. 타 개발도상국에 적용된 자조주택의 점진적 주택건립방식이 우리나라에서는 토지 및 주택금융을 입주자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일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조차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된 이유로 혹한기라는 기후적 요인만을 제시하는 데 그쳤고(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1977:21),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됨에 따른 비용상승을 토지 및 주택금융으로 해소할 수 있었던 배경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를 위한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기본적으로 문헌연구이다. 기존 연구성과물을 비롯한 각종 보고서, 간행물, 언론 보도자료, 국가기록원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행정기관 문건, 국사편찬위원회 정보 열람을 통해 확인한 사료 등 광범위한 문헌을 총망라한다.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이 이루어진 1950년대부터 세계은행과 우리 정부가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한 1970년대까지이다. 이후 제Ⅱ장에서는 자조주택의 태동과 국제적 확산과정을 살펴보고, 제Ⅲ장에서는 첫 번째 연구질문의 규명을 위해 자조주택 이론의 국내 도입 및 전개 과정을 분석한다. 제Ⅳ장에서는 1970년대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 자조주택이 토지 및 주택금융을 제공하는 완성주택으로 대체된 배경을 규명함으로써 두 번째 연구질문의 답을 찾고, 마지막으로 연구결과 요약과 시사점을 제Ⅴ장에서 다루며 결론을 맺는다.


Ⅱ. 자조주택의 태동과 국제적 확산

1904년, 스웨덴이 자조주택 이론을 주택정책에 처음으로 반영한 이후, 1920년대까지 舊 소련을 비롯한 유럽 일대에서는 유사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 중 살아남은 프로그램은 1926년 스톡홀름 사례가 유일했고, 그 영향력도 크지 못했다(Harris, 1998). 그럼에도 이와 관련한 정책적, 이론적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져, 1939년에는 개발도상국인 푸에르토리코에서 부지와 서비스 방식의 초기 형태인 토지와 시설 사업(land and utilities project)이 착공될 수 있었다(Harris, 1999).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여 제Ⅱ장에서는 개발도상국 사상 최초로 자조주택 이론을 국가 주택정책에 반영한 푸에르토리코의 토지와 시설 사업을 살펴보고, 이후 이의 국제적 확산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자조주택의 개발도상국 적용

1939년, 푸에르토리코 폰세2) 주택청(the Housing Authority of Ponce)은 미국 주택청(the United States Housing Authority, USHA)과 함께 그간의 무허가 불량주택지 정책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토지이용 권한의 미제공과 기준미달의 위생 설비가 지적되었다. 이는 문제의 핵심이 주택이 아닌 토지와 기반시설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폰세 및 미국 주택청은 주택 공급에서 필지와 기반시설 공급 중심으로 정책의 중심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즉, 무허가 불량주택지 문제와 관련된 3대 요소(토지, 기반시설, 주택) 중 주택 부분을 입주자에게 위임하고, 공공은 토지와 기반시설 공급에 집중하는 역할분담을 도모한 것으로, 폰세에서 시행된 토지와 시설 사업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Crane, 1944).

공공과 입주자의 역할분담을 꾀한 토지와 시설 사업을 통해 공공은 주택건립에 따른 부담을 어느 정도 절감할 수 있었고, 입주자 또한, 그들의 재정적 여건에 따라 주택의 수준 및 크기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두 이해당사자의 재정적 여건이 개선될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역할분담의 재정적 효과는 실제 사례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폰세 사업 이전인 1938년 푸에르토리코의 세 개의 도시에 건립된 2,756호(Maya-guez 814호, Ponce 1,301호, San Juan 641호)의 공공임대주택 입주자는 4.50달러/월 수준의 임대료를 부담해야 했는데, 이는 당시 해당 지역 빈곤층에게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는 세금감면과 보조금 혜택이 포함된 임대료로, 이를 제외하면 12.95달러/월까지 치솟았다. 더욱이, 입주자의 월 소득수준이 임대료 및 시설이용료의 5~6배 수준이어야 입주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공공임대주택의 혜택을 최빈곤층이 누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면, 토지와 시설 사업의 임대료는 소득수준에 따라 0.50~1.00달러/월 수준(상수도 포함, 전기 비포함)에 불과하여, 공공임대주택에 비해 최대 1/9까지 저렴하였고, 가구당 소득수준이 370달러/년을 초과할 경우, 입주를 제한하였다(Crane, 1944). 사업 수혜계층을 빈곤층으로 한정하여 차상위계층의 수혜를 애초에 봉쇄한 것이다.

한편 폰세 토지와 시설 사업에는 네 개 필지 교차점에 유틸리티 유닛(utility unit)을 건립함으로써 전기와 수도를 일괄 공급했는데, 이를 통해 기반시설 공급 비용을 절반 이상 감축하였다고 한다(Crane, 1944; Crane and McCabe, 1950). 이러한 방식은 위생 코어 유닛(sanitary core unit)이란 이름으로 1970년대 세계은행의 사업에서도 제안되었다. 이는 화장실, 샤워 설비, 부엌 등 상수도를 필요로 하는 시설을 네 필지가 접하는 모서리에 집적시켜 비용절감을 꾀한 방안으로, 기본적으로 폰세 사례와 동일하다(그림 1).


Figure 1. 
Proposed house plan of site & services project in Jamaica

Source: IBRD & IDA (1974a, Annex3:8)



2. 자조주택의 국제적 확산

폰세에서의 토지와 시설 사업을 통해 무허가 불량주택지 문제 해소책으로써 자조주택의 가능성을 확인한 미국 주택청은 이를 푸에르토리코의 다른 지역은 물론, 타 개발도상국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폰세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끈 제이콥 크레인(Jacob L. Crane)3)의 주도로, 1941년 자메이카, 1942년 바베이도스 등지에서 사업이 추진되었고, 특히 1951년 허리케인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자메이카에 적용되며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1952년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은 주택문제 해소의 주요 방안(principal solution)으로 토지와 시설 사업을 권장하기에 이르렀다(Harris, 1998).

폰세 사업 이후, 자조주택 이론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자, 미국 정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의 국제적 확산을 도모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위해 1945년에 창립된 IBRD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IBRD는 차관제공을 통해 개발도상국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은행이었기 때문에 자조주택 사업 확산에 관심을 보이리라 판단한 것이다(Crane and McCabe. 1950). 그러나 1950년대의 IBRD는 주택사업에 관한 관심이 크지 않았고, 이에 미국 정부의 제안도 주목받지 못했다. 결국, 자조주택 이론은 IBRD 사업 중 농촌 주택개량에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데 그쳤다(IBRD, 1950:537-39; Harris, 1998).4) 뒤에서 언급할 세계은행에 의한 국제적 확산이 1970년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보다 20여 년 앞서 유사 방안이 제안된 것이지만, 채택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IBRD를 통한 자조주택 사업 전개가 무산되었음에도, 미국 정부는 여전히 자조주택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냉전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1950~60년대 미국 정부는 舊 소련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고자 자유주의 국가 지원에 몰두하였는데, 이의 한 방법으로 자조주택을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미국의 원조는 크게 군사원조(military aid)와 개발원조(development aid)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중 자조주택은 개발원조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미국은 개발도상국이 직면한 인구증가, 급속한 도시화 등의 도시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극복할 수 있도록 자조적(slef-help), 상호(mutual) 노력에 기반한 공동 개발 프로그램(joint develop-ment program)5)을 마련해 추진하였는데, 그 구체적 방안이 바로 자조주택 건립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1963년 평화봉사단(peace corp)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44개국에 7,300명의 자원봉사자를 파견하는 등 자조 개념에 기초한 개발 프로그램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Bromley, 2003).

중남미 대륙에서 시작한 미국 주도의 자조주택 사업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로 빠르게 확산하자, 마침내 UN도 자조주택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 UN은 아시아 지역에 자조주택 방식을 보급하고자 인도를 중심으로,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일본, 태국, 필리핀, 홍콩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추진하였고, 그 결과 다양한 유형의 자조주택 적용이 가능함을 확인하였다(Alcock et al., 1963). 이듬해인 1964년에도 UN은 “Manual on Self-help Housing”를 발간하며 자조주택 건립을 기술적으로 지원하고자 하였는데, 이 책에는 푸에르토리코 사례는 물론 아프리카 사례(마다가스카르, 가나)도 포함되어 있다(United Nations Dep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1964). 바야흐로 자조주택의 전 세계적 확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적 확산의 결정적 계기는 영국의 건축가 존 터너(John Turner)에 의해 마련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Harris, 1998). 존 터너는 1957년부터 1965년까지 페루에 체류하며 무허가 불량주택지 관련 커뮤니티 활동과 자조 프로그램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1960~7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과 하버드 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통해 자조주택 사업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였다(Chavez et al., 2000; Bromley, 2003). 전술한 자조주택 관련 사업들이 비용 측면에서 공공의 재정적 부담 경감에 주목한 것에 반하여, 존 터너는 입주자의 자주성에 더욱 주목하였다. 터너는 무허가 불량주택지 거주자들이 일반적 통념보다 가난하지 않고, 주택의 소유 혹은 점유를 통해 안정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주택을 유지·보수·개량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Turner, 1965:152; 1968:360; 1972:151-152, 165). 즉, 무허가 불량주택지 거주자들은 주택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고, 따라서 주택문제 해소의 본질은 거주자의 자주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Fichter et al., 1972:241-254; Turner, 1976).

터너의 연구와 저술, 미국의 정책적 지원 등을 통해 자조주택 관련 사업이 국제적으로 확산한 결과, 마침내 1970년 UN은 자조주택에 기반한 부지와 서비스 방식을 개발도상국의 불량주택 문제 해소방안의 하나로 채택하였다(United Nations, 1971:65-67). 이에 세계은행은 <표 1>에 정리된 바와 같이, 1972년 세네갈을 시작으로 불과 2년 만에 아프리카(보츠와나, 잠비아, 탄자니아), 아시아(대한민국, 인도네시아), 중남미(자메이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의 9개 국가에서 차관협정을 체결하며 이의 확산을 주도하였다(Laquian, 1976). 한편, 부지와 서비스 사업은 세계은행이 주도한 최초의 주택 및 도시개발 분야의 사업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세계은행은 부지와 서비스 사업을 추진하며 새로운 분야로의 사업영역 확장을 꾀한 것으로 판단된다(Alacevich, 2009; Van Waeyenberge, 2018). 그러나 수익을 보장할 수 없는 분야에 과다한 지출이 발생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세계은행은 초기 부지와 서비스 사업을 시장에 초점을 맞춰 보수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Alacevich, 2009). 부지와 서비스 사업은 그 시작부터 입주자의 자주성이 아닌 비용절감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Ⅲ. 자조주택의 국내 도입과 전개

1940~50년대의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연이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무허가 불량주택 문제 해소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후순위일 수밖에 없었다. 정상주택과 불량주택의 구분 없이 주택의 공급 자체가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의 주택정책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전재민에게 분배하거나, 가(假) 주택을 건립해 거처를 제공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였다(이연식, 2001; 김태오·최막중, 2016). 구색을 갖춘 주택정책이 시행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에 이르러서이다.6) 우리 정부와 UN 민간 원조 사령부(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가 조직한 한미합동정착위원회(ROK-UNCACK Resettlement Committee)에 의해 난민정착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아람, 2017b; 황윤희, 2018:112). 여기서 본 연구가 주목한 부분은 해당 사업에 자조주택의 특성이 크게 반영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고려해 제Ⅲ장에서는 난민정착사업의 특성과 추진과정, 그리고 결과를 고찰함으로써 이에 반영된 자조주택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1. 자조주택의 도입: 난민정착사업
1) 난민정착사업의 개요

난민정착사업은 난민의 정착 가능성이 큰 농촌 지역을 선정하여 농지개간, 취로사업, 주택건립 등 지역개발 목적의 시범사업을 전개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즉, 도시가 아닌 농촌 지역에 정착지를 마련함으로써 농촌의 정주여건 조성 및 지역개발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인구의 도시집중 문제까지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김아람, 2017b). 사업의 수혜 대상은 자활의 능력을 가진 일반 난민으로 한정7)하였다. 이와 관련한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난민정착사업이란 “시내에 거주하는 집이 없는 사람 중 천막민, 철거민, 토굴민들에게 우선적으로 OEC8)에서 제공하는 건축자재를 알선하여 시유지에 입주자의 노동력으로 집을 짓게 하는” 사업이라 정의하였다. 스스로 주택을 건립할 수 있는 자활 의지를 가진 도시빈민만을 사업 수혜 대상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편, 주택건립을 위해 제공되는 건축자재는 5평가량의 장옥을 지을 수 있는 분량으로, 어떠한 조건도 없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는 언론 보도도 확인할 수 있다.9)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난민정착사업이란 무허가 불량주택 거주자들이 스스로의 노동력을 동원해 주택을 건립하되 이를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우리나라의 난민정착사업은 푸에르토리코의 토지와 시설 사업과 유사한 원조 자조(aided self-help) 사업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이렇게 추진된 난민정착사업은 1952년 69,165명, 13,833세대, 1953~54년 441,885명, 86,377세대, 1955년 101,665명, 20,333세대를 대상으로 시행되며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였다(김아람, 2017a). 이에 힘입어 1957년부터는 그 대상지를 농촌에서 도시로 확대하였고(김아람, 2017b), 1961년에 이르자 사업을 통해 조성된 마을이 천여 개소, 사업장 단위로는 331개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송주인, 1961). 이들 사업 중 하나가 바로 본 연구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이다(그림 2).


Figure 2. 
Miari Assimilation Project (1958)

Source: The Public Information Office (1958a; 1958b), “Miari Assimilation Project Site” accessed June 30, 2020



2) 미아리 난민정착사업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은 OEC의 주도로 추진되어, 1957년 3월 발표된 ‘난민정착사업계획서’에 따라, 약 1,000가구의 이주를 목표로 동년 4월 착공되었다(Kaufman, 1959:3; 황윤희, 2016:131). 사업 대상지 면적과 관련해서는 사료에 따라 다소 간의 차이가 있는데, Kaufman(1959:3)은 262에이커(약 32만 평)의 토지를 서울시가 제공하여 사업을 추진하였다고 기록한 반면, 당시 언론은 12만 평의 황무지에 동당 5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250동의 주택이 건립되었다고 보도하였다.10) 다만 대상지의 면적과는 무관하게, 미국 원조기관의 계획에 따라 사업이 추진되었다는 사실만은 동일하다. 사업내용과 관련하여 본 연구에서 주목한 부분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난민정착사업을 통해 건립된 주택이 공공이나 건설업체가 아닌 입주자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난민정착사업계획서’에 따른 단계별 주택건립계획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택건설 관련 기술 보유자11)를 중심으로 선정된 첫 번째 입주자 그룹(50세대)이 정부가 제공한 텐트에 임시 기거하며 36일간 주택 50호를 건립하고, 완공 후 입주한다. 이후 첫 번째 그룹이 기거하던 텐트에 두 번째 그룹(50세대)이 임시 기거하며 첫 번째 그룹과 함께 36일간 주택 100호를 건립하고, 완공 후 입주한다. 세 번째 그룹(50세대)은 기 완공된 잔여 50호에 입주하여 첫 번째 및 두 번째 그룹과 함께 주택 150호를 건립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100여 일 동안 주택 300호를 건립하는 서울시와 OEC의 계획은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계획대로 추진되었고, 그 결과, 다량의 주택이 건립되었다(Kaufman, 1959:3; 정은경, 2015; 황윤희, 2018:123-143). 그런데 그룹에 의한 순차적 자조주택 건립과 입주는 UN의 “Manual on Self-help Housing”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면, 각 40명으로 조직된 10개의 그룹이 주택 400호를 5개월간 순차적으로 건립하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United Nations, Dep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1964). 따라서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에 반영된 그룹을 통한 집단 자조주택 건립 방식은 국제적 기준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더 앞서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미아리 난민정착사업 준공 이듬해인 1958년, 보건사회부 주택과는 사무관 이영빈을 6개월간 미국에 파견하여 선진 주택정책을 견습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기간 중 이영빈은 약 2개월을 푸에르토리코에 머무르며 자조주택 관련 사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320달러 상당의 건축자재 및 관련 설비를 입주자에게 무상으로 임대하였고, 입주자는 그들의 자조적 노력을 동원해 주택을 건립하였다. 여기서 이영빈(1959)이 주목한 부분은 약 1,000달러에 이르는 건립 후 자조주택의 시장 가치12)였다. 그는 투입한 정부 예산의 3배 가까운 가치가 창출된 것에 주목하며 자조주택의 국내 도입 가능성을 크게 보았고, 입주자의 노동력을 동원한 주택건립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는 적극적으로 조합결성을 지원하고 협동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1950년대 후반까지 한국의 자조주택은 존 터너가 강조한 입주자의 자주성에 기반하고 있었고, 공공에 의한 완성주택 공급, 비용상승 상쇄를 위한 주택금융 도입이라는 한국적 변용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입주자들에 의한 자활공동체 조직을 목표로 설정하고, 정부 및 국제 원조기관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 입주자 그룹까지는 주택건립이 가능한 건설 관련 기술 보유자를 중심으로 입주자를 선정하였지만, 네 번째 그룹부터는 정착촌의 자활공동체 조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원자를 우선적으로 선정하도록 계획하였다. 즉, 입주자 선정 단계에서부터 채소밭이나 화훼농장, 가축농장의 운영이 가능한 지원자를 선발함으로써 입주자 전체의 정착 생활을 지원하고, 나아가 정착촌을 자급자족 공동체로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황윤희, 2018:130). 이와 더불어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미 대외 원조기관(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은 입주자들이 정착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직업교육, 공공사업, 법률지원, 상점 및 가내수공업 관련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는데, 이 역시 정착촌 내에서 자급자족 경제를 구현하기 위함이었다(정은경, 2015).

자활공동체 조직, 자급자족 경제 구현이라는 난민정착사업의 목표는 입주자들의 정착촌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실질적 목적도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대외 원조자금 감축에 따른 정책적 대안으로도 볼 수 있다(Macdonald, 2001:425, 432; 이현진, 2006).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미국이 자조주택 사업을 국제적으로 지원한 배경에는 세력화된 舊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국가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따라서 원조자금을 감축할 수 있고, 미국의 문화적 개입이 가능하며, 민주주의적 시민의식을 고취시켜 궁극적으로 미국적 생활양식13)의 이식을 가능케 하는 자활공동체 운영(허은, 2008:285-320; 정은경, 2015)은 여러모로 미국의 정책적 지향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난민정착사업의 결과
1) 자활공동체 구현 실패

정착촌이 조성되기 시작한 1957년부터 1959년14)까지 USOM을 비롯한 원조 당국은 정착촌 실태와 관련한 조사를 여러 번 실시하여 이를 보고서로 남겼다.15) 이에 따르면, 입주 후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상당수의 공동작업장과 상점들이 폐업하였고, 다수의 최초 입주자들이 정착촌을 이탈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정착촌 입주자의 낮은 평균소득과 소비 수준(일용직 노동자 18,800환 및 19,800환, 소매상 24,900환 및 23,100환)에 기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당시 서울시 월 평균소득 및 평균지출액이 각각 62,700환, 68,300환이었음을 고려하면, 정착촌 입주자, 특히 자활공동체 운영과 관련한 정착촌 내 소매상들의 소득수준이 극히 낮았던 것이다.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소득이 정착촌 내에서 확보되지 않자 상당수의 입주자(약 35%)는 주택을 매도하고 취업기회가 많은 도심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떠난 자리는 대부분 서울로 출퇴근하는 계층으로 대체되었다. 대체된 계층은 공동작업장 노동과 무관하였기에 정착촌의 자활공동체 구현은 더욱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Kaufman, 1959:5-6, 13-14, 황윤희, 2018:145, 151-153).

이처럼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자활공동체 구현이 실패한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정부의 무분별한 입주자 선정을 지적할 수 있다.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최초 계획은 세 번째 그룹까지는 건설기술 보유자를 중심으로, 그 이후부터는 자활공동체와 관련한 기술 보유자를 중심으로 입주자를 선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난민정착사업 대상 지역을 정착촌이 아닌 난민 수용소로 인지한 듯, 계획과 무관한 난민들을 수시로 미아리에 입주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재민의 입주이다. 1957년 8월 17일, 서울 양동 무허가 불량주택지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약 200여 세대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들을 미아리로 이주시켰다. 폐허가 된 대지를 토지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도시계획에 입각한 신규 주택건립을 명목으로 이재민들의 무허가 불량주택 재축을 불허하였기 때문이다.16) 시내 무허가 불량주택 철거로 인해 거처를 잃은 철거민들의 이주 대상지도 미아리였다.17) 자활공동체 기여 역량과 무관한 입주자가 지속적으로 미아리 정착촌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들의 입주는 사건·사고에 따른 임시방편적 성격이 강하였기에 정부는 임시 텐트 등 최소한의 정주 여건만을 제공하였고, 이들은 안정적 정주 환경 마련을 위해 부득불 무허가 불량주택을 건립할 수밖에 없었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3:721-722). 정부의 무분별한 입주자 선정이 자활공동체 구현 무산은 물론, 무허가 불량주택의 확대 재생산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외에도, 자활공동체를 구현하지 못한 이유로, 공동작업장의 부실 운영 및 관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임시방편적 입주자 선정으로 인해 공동작업장이 필요로 하는 적정 기술 보유자의 입주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인력이 부족하니 공동작업장의 생산량은 기대치를 밑돌았고, 이로 인해 입주자의 적정 소득수준 확보가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부정부패도 부실 운영 및 관리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최소한의 소득 확보가 어렵게 되자 입주자들은 정부가 무상 제공한 목재와 시멘트 등을 사적으로 유용하거나 판매하였고, 이는 다시 공동작업장의 부실 운영으로 귀착된 것이다. 기타 주택과 공동작업장 간의 거리가 멀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 이웃 간의 외상거래(credit selling)가 과도하였다는 점 등도 자활공동체 구현의 실패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2) 자조주택 건립 실패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주택은 건설기술을 보유한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그룹 입주자들이 건립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건립한 주택은 1957년 6월 준공된 50호에 불과했는데, 이는 관련 기술 보유자 모집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이다. 결국 주택건립을 위해 별도의 기술자를 비용을 지불하고 고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Kaufman, 1959:3). 그럼에도 사업은 지속 추진되었고, 마침내 동년 12월, 약 6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완공할 수 있었다.18)

우여곡절 끝에 주택건립이 완료되었지만, 준공만으로 해당 사업의 성패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건립된 주택이 거주에 문제가 없는 최소한의 성능을 확보했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 확인한 자료는 앞서 언급한 조사보고서이다. 1959년 9월 26일, USOM은 건립된 주택 중 약 35%를 대상으로 주택의 관리상태와 관련하여 조사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르면, 지붕이 새는 경우가 77%, 벽이 젖는 경우 33%, 석고 자재가 벗겨지는 경우 28%, 벽에 금이 간 경우 27%, 굴뚝이 부서지거나 소실된 경우 26%, 대문이 파손된 경우 19%, 온돌이 파손된 경우가 10%였고, 전체 대상 주택 중 무려 95%가 이와 같은 문제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Kaufman, 1959:17). 조사가 이루어진 시점이 주택 준공 후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임을 고려하면, 주택 대부분이 애당초 부실 시공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건립된 주택의 주재료는 흙벽돌(mudbrick)과 목재였는데(Kaufman, 1959:16), 이 중 흙벽돌은 내구성에 문제가 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져 벽이 파손되었고, 이미 난민정착사업 이전에도 주택붕괴 사고로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정은경, 2015).19) 건축자재에서부터 시공까지 총체적 부실 속에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자조주택은 허가받은 불량주택을 확대 재생산하고 말았다.

결국,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은 주택건립과 자활공동체 구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지 못한 채 실패로 귀결되었고, 이에 더는 유사 프로그램이 추진되지 못하였다. 특히 불량주택의 확대 재생산은 정부 차원에서 후속 사업을 추진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로 판단되는데, 이는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에 국한된 이유만은 아니다. 1960년대 이루어진 다수의 이주 정착지 조성사업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보고서 및 연구(서울특별시, 1978:209; 장세훈, 1988; 손정목, 2003)들은 당시 사업의 실패 원인을 무허가 불량주택의 확대 재생산으로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여타의 사업과 다른 난민정착사업만의 특성, 즉 입주자의 노동력을 동원한 자조주택 건립과 자활공동체 구현이라는 고유의 사업내용조차 추진동력을 잃고 더는 추진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정부는 무허가 불량주택 철거와 철거민 이주 정착촌 조성사업을 지속 실시했고, 그 결과, 1970년까지 20개 장소에 43,000여 가구를 이주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서울특별시, 1978:209).


Ⅳ. 자조주택의 변용
1. 자조주택에서 완성주택으로의 전환

제Ⅱ장과 제Ⅲ장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미국 정부가 자조주택 이론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한 이면에는 대외원조자금의 감축, 민주주의 의식의 고취, 냉전체제 대응 등이 있었다. 특히 미국 정부의 대외원조자금 감축은 재정적으로 열악한 우리 정부가 미국이 제안한 자조주택 건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한국의 자조주택은 미국이 강조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입주자에 의한 점진적 주택건립을 특징으로 하는 자조주택이 우리나라에서는 표준화된 완성주택 공급으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김태오·최막중, 2017). 이에 본 장에서는 이러한 대체가 발생한 배경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조주택의 완성주택으로의 대체는 먼저 실물 주택이 아닌 정부가 주관한 공모전 설계(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59년, 보건사회부는 ‘제2회 전국주택설계현상’을 개최했는데, 주목할 부분은 제1회 공모전과 달리, 자조주택 종목을 신설했다는 사실이다. 1958년 공고된 ‘제1회 전국주택설계현상’에는 독립주택설계, 연립주택설계, 아파트 주택 설계, 동리 종합계획 설계, 국산 건축자재의 다섯 종목으로 작품을 모집20)하였으나, 이영빈의 푸에르토리코 방문 이후 공모된 1959년 제2회 현상에서는 도시형 자조주택, 농촌형 자조주택, 도시형 국민주택, 농촌형 국민주택의 네 종목으로 변경된 것이다(대한주택영단 편집실, 1959:94-99). 따라서 당시 우리 정부가 자조주택의 보급을 목적으로 ‘주택설계현상’ 공모에 이를 반영하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도시형 자조주택 종목에서 1등으로 당선된 안영배의 설계(안)는 여러모로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그림 3). 먼저 푸에르토리코 사례의 유틸리티 유닛과 같이, 비용절감을 강구할 수 있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상수도 시설을 네 필지의 접점에 마련했던 푸에르토리코 사례와 달리, 당선작의 상수도 시설은 주택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화장실과 부엌도 떨어져 있다. 기반시설 공급 비용 절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점진적 건립이라는 자조주택의 기본적 개념도 배제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설계(안)가 확장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당선된 설계(안)는 화장실, 세탁실, 창고, 아궁이 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주택으로 판단된다.


Figure 3. 
Prize-winning Urban Self-help Home Design

Source: Korean Housing Administration Editorial Department (1959:96)



당선된 설계(안)와 관련하여 당시 언론은 67만 6,500환의 저렴한 비용으로 주택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해당 기사에서조차 비용절감 방안으로 제시된 내용은 목재의 토막이 발생하지 않도록 건축자재를 규격화하는 방안뿐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비용 상승이 우려되는 설계(안)로, 이중창 설치, 온돌 개량, 반 수세식 화장실 설치, 개폐식 벽 설치(일부 벽을 미닫이문으로 대체하여 하나의 큰 방이나 여러 개의 작은 방을 선택하여 사용 가능) 등이 이에 해당한다.21) 따라서 본 공모전 결과를 토대로 1950년대 후반 우리 정부가 지향한 자조주택을 추정하면, 입주자이 점진적으로 건립하는 주택이 아닌 완성주택, 저소득층이 아닌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주택, 마지막으로 공공의 재정적 부담경감이 고려되지 않은 주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보도에는 자조주택과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해당 주택이 자조주택이라 명명된 이유이다. 관련 당국자에 따르면, “자기 손으로 소정의 재료만 마련하면 지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되고, 이 집을 지은 후 가내에서 소규모의 바느질 같은 부업을 할 수 있는 사업장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해서 자조주택”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도는 ‘자기 손으로’ 마련하는 대상이 재료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주택건립까지 의미하는지를 확인할 수 없어, 명확한 이해에 한계가 있지만, 최소한 한국의 자조주택과 국제적으로 통용된 자조주택 간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단초라 할 수 있다. 즉 국제적 의미의 자조주택이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 동원과 이를 통한 공공의 비용절감을 특징으로 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입주자의 비용절감과 공간의 다목적 활용을 특징으로 하는 주택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같은 선진 국가에서는 이 자조주택의 건축을 정부가 장려하는데 정부에서 시멘콘크리트의 틀을 만들어 빌려주면 집 지을 사람은 그 틀을 빌려다가 집터 위에 세워놓고 시멘트만 이겨서 그 속에 다져 넣으면 집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으나 자조주택 도면에 의하여 짓는 사람에게는 최대한의 자재알선을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입주자가 직접 주택을 건립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미국 사례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자재 구입을 지원하는 선에서 정부 역할을 한정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 이영빈(1959)의 기록은 자조주택을 이와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주택이 필요하면서도 재력이 부족할뿐더러 전기한 바 융자주택 또는 후생주택의 혜택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무주택자들이 자기와 가족 그리고 인근의 무주택자들과 협력하여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제공함으로써 얻어지는 주택건설의 한 방편”으로 자조주택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비용절감을 고려하지 않은 중산층 이상의 완성주택을 지향한 공모전 설계(안)와 달리, 이영빈은 ‘비용절감이 가능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으로 자조주택을 소개한 것이다. 다만 이영빈도 자조주택을 입주자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건립하는 주택으로 소개하였음에도, 입주자의 여건에 따라 긴 시간적 여유를 두고 점진적으로 건립하는 주택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영빈의 주장과 앞서 살펴본 공모전 결과는 입주자의 경제적 수준과 건립비용의 측면에서는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최소한 주택의 점진적 건립만은 두 사례 모두 지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70년대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 발생한 자조주택의 완성주택으로의 대체 현상(김태오·최막중, 2017)의 연원은 최소한 1959년에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 정부는 자조주택의 점진적 건립이 아닌 표준화된 완성주택의 공급을 통해 주택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와 같은 자조주택의 완성주택으로의 대체 현상은 지속되었다. 먼저 1960년 동아일보는 정부가 발표한 자조주택 4천호 건립계획을 보도하며, “대지는 있으나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재를 무상으로 배부하고 자금을 저리로 융자해” 건립하는 주택으로 자조주택을 소개하였다.22) 민간부문에서의 주택건립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공공정책의 하나로 자조주택을 설명한 것이다. 다만 지원 대상을 토지 소유자로 제한한 것으로 보아 저소득층 대상 사업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건설기술과 관련한 교육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토지 소유자가 민간 건설업자를 고용해 주택을 건립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한 시책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1962년 1월, 이전과는 다른 자조주택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자조주택을 “토지와 노동력을 자기가 부담하고 기술 및 자금을 뒷받침해주는 주택”으로 정의하며 노동력의 입주자 부담과 기술의 공공지원을 새롭게 언급했기 때문이다.23) 이는 이전의 우리나라 자조주택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특징이자, 같은 시기 해외 자조주택 사업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다만 이 기사에서는 자조주택이 건립될 대상 지역으로 저소득층 주택문제가 심각한 대도시가 아닌 시·읍 등 중소도시를 특정하고 있어, 1950년대 IBRD가 수용한 자조주택, 즉 도시가 아닌 농촌의 주택개량을 목적으로 한 사업으로 인지한 듯하다.

하지만, 동년 8월, 서울시는 철거민을 대상으로 호당 10평의 대지와 건축자재를 지급하고, 공동의 노력으로 주택을 건립한다는 이전과 구분되는 자조주택 건립계획을 발표하였다.24) 이는 저소득층인 철거민 대상의 자조주택사업이자,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 동원을 통한 주택건립이라는 점에서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에 근접한 계획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지공급 주체를 입주자에서 공공으로 변경했다는 특징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입주자의 여건에 맞춰 점진적으로 주택을 건립한다는 특징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1966년이 되자, 서울시는 또 다른 자조주택 건립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는 영세민에게 8평씩의 대지를 나누어 주고, 2호 연립의 자조주택(건평 8평)을 서울시가 직접 건립해 분양하겠다는 계획으로, 여기에는 1만 원의 생활보조금과 가구당 3.6kg의 근로 구호양곡 지급도 포함되어 있었다.25) 대지와 건축자재를 정부가 부담하는 것은 1962년 8월 언론 보도와 동일하나, 주택건립의 주체가 입주자에서 정부로 변경되었다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을 동원한 주택건립이라는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 특성마저 이 시기에 이르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공공이 건립·분양한 명목상의 자조주택은 광주대단지 사건(1971년) 이후에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곽광택, 1973).26)

한국의 자조주택과 관련한 의미 있는 변화는 1968년 일어났다. 서대문구 천연동에 850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소위 프레임식(frame式) 아파트 건립계획이 발표된 것이다.27) 여기서 프레임식 아파트는 골조아파트라고도 불렸는데, 아파트의 골조 및 기반시설 공사는 정부가 담당하여 선 건립하되, 각 주호(住戶)의 내부공사만은 입주자가 개별 부담하여 건립하는 아파트를 의미한다(서울특별시, 1967:27-30, 1969:8-9; 최막중·최봄이, 2017; 강난형, 2020). 무엇보다 공공의 비용부담을 절감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지만,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을 어느 정도 동원하고자 하였고, 각 주호의 완성을 입주자의 자주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하였기에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 개념을 어느 정도 수용한 사업이라 볼 수 있다. 해당 사업은 시민아파트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

2. 완성주택 공급을 위한 주택금융 접목

자조주택이란 용어가 언론 보도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이 착공된 1957년인데, 이미 이 시기부터 주택금융은 자조주택과 연동되어 있었다. “주택건설 융자의 자격 등”이란 제목의 최초의 자조주택 관련 언론 보도28)에 따르면, 정부가 제공하기로 한 자조주택 융자는 장기와 단기로 구분되는데, 장기 담보 융자는 대지대금을 제외한 주택건설자금의 80%를 10년 상환 8% 이자 조건으로, 단기 담보 융자는 67%의 자금을 1년 상환 12% 이자 조건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장기융자의 경우는 각 지방 단위로 조직된 주택조합 조합원, 단기융자의 경우는 집단주택을 건설하려는 업자로 그 대상을 제한하여, 개인 자격 융자는 불허하였다. 또한, 주택을 집단적으로 건립할 때 하수도, 도로 등 공동 사용 시설 건립비용을 융자하겠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정부가 부족한 기반시설 공급을 민간 부담으로 해소하고자 하였음도 알 수 있다. 비록 해당 언론 보도는 자조주택의 정의를 포함하고 있지 않아, 융자를 통해 건립될 주택의 형태나 건립방식 관련 정보는 확인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 자조주택이 처음 소개될 때부터 주택금융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다.

자조주택의 정의는 1959년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자조주택이란 ‘당국에서 주택 건설자재만을 원조하여 주는 것으로 원조액은 25만 환 정도, 건평은 9평 미만, 그리고 자재 대금을 연부로 상환하는 것’이었다.29) 그러나 이와 같은 설명만으로는 25만 환 상당의 자재를 직접 제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재와는 별도로 25만 환을 원조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보다 명확한 정의는 이듬해인 1960년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다. 보건사회부가 자조주택 4천 호를 7월 착공, 10월 준공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조주택을 ‘대지는 있으나 돈이 없어 집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재를 무상으로 배부하고 자금을 저리로 융자’해 건립한 주택이라 정의한 것이다.30) 보건사회부 계획과 별도로, 서울시도 이 무렵 시범자조주택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시범자조주택 162호를 응암동에 건립하기로 하고, 입주자에게 1호당 15만 환의 자금과 목재 1,000 포드피드,31) 양회 1톤의 자재를 지급해주고 10년 기한으로 상환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32) 1962년에는 경제개발계획의 하위계획으로 주택건설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여기서도 자조주택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정의한 자조주택은 “토지와 노동력을 자기가 부담하고 기술 및 자금을 뒷받침해주는 주택”이었다.33)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자조주택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1960년대 초까지 자조주택 관련 사업에는 항시 주택금융이 함께 하였다. 다만, 토지와 노동력의 자기부담이라는 융자조건으로 말미암아 주택금융의 저소득층 수혜 가능성은 크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이르자 주택금융과 연동한 자조주택 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재해민이나 무허가 불량주택 철거민들의 구호를 목적으로 정부가 주택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자조주택이라 일컬은 것이다.34) 이에 따라 구호양곡이나 생계보조금이 자조주택 입주자에게 제공되기도 하였지만, 주택금융이 제공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조주택과 주택금융의 분리는 얼마 가지 못했는데, 이는 1967년 창설된 한국주택금고에 기인한다. “서민주택자금의 자조적 조성을 뒷받침하고 주택자금의 공급과 관리의 효율적인 운영”을 목적으로 창립된 한국주택금고(1969년 한국주택은행으로 변경)를 통해 서민을 대상으로 한 주택금융정책이 시행35)되자, 다시 자조주택과 주택금융이 연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1971년, 자조주택 건립 및 대지 매입에 필요한 비용의 50%를 15년 상환 조건으로 융자하는 등 다시 자조주택과 주택금융이 연동된 사업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36) 이에 앞서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에서도 정부가 선 부담한 골조 및 기반시설 공사비용을 입주자가 장기분할 상환하도록 하였는데, 이 역시 주택금융이 적용된 자조주택 건립 사례로 볼 수 있다.


Ⅴ. 결 론

본 연구는 1939년 이후 개발도상국의 저소득층 주택문제 해법으로 크게 주목받아 온 자조주택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은 그렇지 못하였음에 주목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 나아가 국내에서 시행된 세계은행 차관사업에서조차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된 요인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주요 연구결과 및 시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타의 개발도상국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여타의 원조사업과 마찬가지로 자조주택의 국내 도입은 미국 정부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미국 원조기관을 중심으로 자조주택 방식이 적용된 난민정착사업이 추진되었다는 사실, 보건사회부 주택과 주무관이 자조주택 관련 사업내용을 푸에르토리코 견습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돌아왔다는 사실, 그 직후인 1959년 보건사회부가 주관한 주택설계현상공모에 자조주택 종목이 신설되었다는 사실 등에 기반한다. 또한, 최초 우리나라에 도입된 자조주택의 건립 방식은 당시 타 개발도상국에 적용되었던 방식과 유사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에 적용된 입주자 그룹에 의한 순차적 자조주택 건립방식이 UN(1964)의 “Manual on Self-help Housing” 상의 건립방식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둘째, 자조주택의 영향이 크지 못했던 이유는 도시 지역을 대상으로 자조주택 방식을 적용한 첫 사업인 난민정착사업이 무허가 불량주택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부정적 결과를 야기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손정목(2003)은 미아리 난민정착사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철거민 정착지 조성사업을 반복 시행하였다고 주장했고, 그 대표적 사례로 광주대단지를 언급한 바 있지만, 미아리 난민정착사업 이후의 정착지 조성사업은 공공이 주택을 건립하지 못할지언정, 입주자에 의한 점진적 자조주택 건립만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난민정착사업의 실패로 무허가 불량주택이 확대 재생산되었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에 적용된 자조주택 방식 또한 실패로 판단하였고, 이로 인해 더는 자조주택 방식이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셋째, 1970년대 세계은행 차관사업으로 추진된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될 수 있었던 요인은 미아리 난민정착사업 실패 이후, 우리나라의 자조주택 관련 사업이 완성주택 공급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기점은 1959년이다. 보건사회부가 공모한 ‘제2회 전국주택설계현상’에서 입주자가 소정의 재료만 부담하면 건립할 수 있는 다목적 주택을 자조주택으로 소개함에 따라, 입주자의 점진적 주택건립을 지향하는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과 의미상의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서의 자조주택 관련 사업은 대지와 노동력은 입주자가 부담하되 공공이 주택금융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고, 종종 공공에 의한 기술지원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비록 점진적 주택건립이 완성주택 공급으로 대체되었지만, 노동력 제공의 주체만은 입주자로 정의되어 있었기에, 1960년대 초까지는 최소한의 자조주택 특성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62년 8월이 되자, 이와 같은 사업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 토지비용 부담의 주체가 입주자에서 공공으로 변경되었고, 1966년에 이르자, 주택건립의 주체도 공공으로 변경되었다. 자조주택을 정의하는 최소한의 특징인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 동원을 통한 주택건립마저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 다만,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입주자의 주호 내부 공사 부담과 같이 또 다른 형태로 입주자의 역할이 규정되기도 하였다. 정리하면, 한국의 자조주택은 최초 도입부터 완성주택 공급을 전제로 추진되었고, 이후 입주자의 자조적 노동력 동원을 통한 주택건립조차 대부분 공공에 의한 일괄 건립으로 대체되며, 국제적 기준의 자조주택 특성을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조주택과 관련한 한국만의 독특한 역사가 있었기에,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의 자조주택의 완성주택으로의 대체가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자조주택이 완성주택으로 대체되자 이에 따른 비용상승은 필수적이었는데,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서는 이를 주택금융을 도입해 상쇄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정책적 대응이 가능했던 배경은 1957년 자조주택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을 때부터 주택금융과 연동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자조주택 도입 시점부터 주택을 건립하려는 조합이나 건설업자에게 주택금융을 제공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1960년대 중반 수재민, 화재민, 또는 철거민을 대상으로 한 구호주택을 자조주택이라 부르며 일시적으로 자조주택과 주택금융 간의 연결고리가 끊기기도 하였으나, 1967년 한국주택금고 설립 이후에는 재차 상호 연동되며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었다. 따라서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 적용된 자조주택의 완성주택으로의 대체와 이에 따른 주택금융의 적용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그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와 같은 경험을 토대로 ‘광주권 지역개발사업’에 주택금융이 도입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자조주택이 주택금융을 통한 완성주택 공급으로 변용됨에 따라, 터너가 강조했던 입주자의 선택에 따른 주택문제의 자주적 해결이라는 이념적 요소는 한국 주택정책에서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본 연구의 한계는 기본적으로 자료의 한계에 기인한다. 따라서 추가적 사료 발굴을 지속 추진함으로써 후속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만 1959년 이영빈이 자조주택과 관련하여 언급한 협동조합주택을 고찰하지 못한 부분은 본 연구의 가장 큰 한계이자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조합원의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를 토대로 주택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협동조합주택은 기본적으로 자조의 의미를 내포(하성규, 1993)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13년 ‘하우징쿱 주택협동조합’을 시작으로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주민기숙사 주택협동조합’ 등 민간을 중심으로 한 협동조합주택이 하나둘 등장(김소연, 2016)하고 있는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그 연원을 추적한다는 의미에서 관련 후속 연구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정부 문헌이나 언론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당시 주민들의 실제적 삶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자조주택을 일상생활 공간으로 체험한 입주민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생활사, 문화사, 사회사 측면에서의 후속 연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Notes
주1. 1898년 미-스페인 전쟁의 미국 승전 이후 푸에르토리코는 미군정의 지배를 받게 되어, 1948년 총독 선출 권한을 돌려받기까지 미국의 식민국가였음. 1952년 국방, 외교, 통화를 제외한 내정 일체를 이양 받아 미국의 자치령이 되었으나, 이후에도 냉전체제 아래 미국 발전론 정책의 상징적 쇼케이스로 기능하며 지속적으로 미국의 직·간접적 혜택을 받은 국가임(강성호, 2010).
주2. 푸에르토리코 남부의 도시.
주3. 제이콥 크레인(Jacob L. Crane)은 당시 미국 공공임대주택국(US Public Housing Administration) 부국장(assistant director)으로 “aided self-help” 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음(Harris, 1998).
주4. IBRD가 개발도상국 재정 지원 범위에 주택 부분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임(Harris, 2003).
주5. 1960년 9월 8일 public law 86-735 제정을 통해 법제화되어 추진되었음.
주6. 이 역시 난민 구호사업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나 사업내용에 주택건립이 포함되었기에 주택관련 정책으로 판단하였음. 한편, 1952년은 서울시 사회국 사회과 내에 주택계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서울시 최초의 주택전담부서였음(황윤희, 2018:118).
주7. 동아일보, 1955.2.4., ‘구호물자를 받을 자격?’.
주8. 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의 약자로 UN 경제조정관실을 뜻함.
주9. 경향신문, 1957.7.7., ‘난민주택입주자격’.
주10. 조선일보, 1957.12.24., ‘6천명 수용할 난민주택 완성’.
주11. 첫 번째 입주자 그룹은 목수 25명, 미장이 20명, 타일공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Kaufman, 1959:3).
주12 건립된 주택의 저당설정을 위해 은행이 평가한 금액.
주13. 냉전체제 하 미국은 자유진영 국가의 결속을 목적으로 ‘미국적 생활양식’의 전파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의 번영을 홍보함으로써 자유진영국가의 이탈을 방지하고, 한국 국민의 대미 의존도를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음. 한국전쟁 전에는 민주적 생활양식을 일상생활 속에 확립하고자 가정생활의 평등을 강조하였으나, 한국전쟁 후에는 자동화된 현대문명의 혜택을 보다 강조하였음(허은, 2014).
주14. 발간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사업 착공 2년 후 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1959년 자료로 추정함.
주15. 해당 문건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사료군은 ‘Record Group 469: Records of U.S. Foreign Assistance Agencies, 1942-1963’, 사료계열은 ‘Unclassified Subject Files, ca.1955-11/03/1961 [Entry P 319]’이며 여기에는 본 연구에서 인용한 Kaufman(1959)의 ‘Survey of Miari Assimilation Project, Revised’가 포함 되어 있음.
주16. 동아일보, 1957.8.23., ‘강우 속에 아우성치는 재민 준비 없이 강제이송’; 동아일보, 1957.8.23., ‘단상단하’.
주17. 경향신문, 1957.10.5., ‘대책 없이 강제철거’.
주18. 경향신문, 1957.12.24., ‘미아리에 난민부락건설’.
주19. 동아일보, 1955.3.14., ‘재건주택에 이상’.
주20. 동아일보, 1958.1.11., ‘보건사회부공고 제438호 제1회 전국주택설계현상 모집공고’.
주21. 조선일보, 1959.10.7., ‘집은 이렇게 지었으면’.
주22. 동아일보, 1960.1.16., ‘10월까지 자조주택 4천호 완성’.
주23. 경향신문, 1962.1.24., ‘경제개발계획과 우리의 살림살이 주택(5)’.
주24. 동아일보, 1962.8.27., ‘철거세민 천여 가구에 자조주택’.
주25. 경향신문, 1966.9.23., ‘대지, 생계보조금 만원 지급’.
주26. 동아일보, 1973.1.10., ‘연내 성남단지에 주택 4천 채 건립’.
주27. 매일경제, 1968.6.12., ‘19일부터 착공키로’.
주28. 동아일보, 1957.5.12., ‘주택건설 융자의 자격 등’.
주29. 동아일보, 1959.5.3., ‘왜 서민층의 환영 못 받나, 주택자금융자의 실태’.
주30. 동아일보, 1960.1.16., ‘10월까지 자조주택 4천호 완성’.
주31. 포드피드는 보드피트(board feet, BF)의 오기로 판단됨.
주32. 동아일보, 1960.11.16., ‘신청자가 쇄도 시범자조주택’.
주33. 경향신문, 1962.1.24., ‘경제개발계획과 우리의 살림살이 (5) 주택’.
주34. 매일경제, 1966.11.4., ‘영세시민월동대책 서울시 구호곡 확보’.
주35. 매일경제, 1967.6.28., ‘주택난 해소에 얼마나 도움 줄까’.
주36. 경향신문, 1971.12.25., ‘연립, 자조주택 1,300채 짓기로’.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저자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이신 故 최막중 교수님의 통찰에서 시작되었으며, 2020년도 ‘4단계 두뇌한국21 사업(4단계 BK21 사업)에 의하여 지원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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