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Planning Association
[ Article ]
Journal of Korea Planning Association - Vol. 50, No. 3, pp.5-22
ISSN: 1226-7147 (Print) 2383-9171 (Online)
Final publication date 10 Mar 2015
Print publication date Apr 2015
Received 01 Dec 2014 Reviewed 29 Jan 2015 Accepted 29 Jan 2015 Revised 10 Mar 2015
DOI: https://doi.org/10.17208/jkpa.2015.04.50.3.5

대한제국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재평가: 근대도시계획의 보편적 특성을 중심으로

유치선** ; 이수기***
**Hanyang University csyoo86@hotmail.com
***Hanyang University sugielee@hanyang.ac.kr
Reevaluation of the Hansung City Improvement Project in the Daehan Empire: Focusing on Universal Characteristics of Modern Urban Planning
Yoo, Chisun** ; Lee, Sugie***

Correspondence to: *** Hanyang University sugielee@hanyang.ac.kr

Abstract

The city of Hansung experienced massive redevelopment in the 19th century. Although the Hansung Improvement was an urban planning project, the project has never been considered as an example of modern urban planning in Korea. This study first criticizes previous research claiming that the Hansung Improvement project was an imitation of Washington D.C.. Then, the Hansung Improvement project is reevaluated with the context of the universality of modern urban planning. As a conclusion, this study claims that the Hansung Improvement project should be considered as an example of modern urban planning in Korea, as it has much in common with other urban planning projects of the modern era. First of all, the project was designed to serve the public good. In addition, it was initiated and executed by the central and regional governments and developed through the modern legal system. The project also included a modern land expropriation process for land ownership approval. Furthermore, it oversaw the installation of modern infrastructure systems. These findings indicate that the Hansung Improvement project shares many aspects associated with modern urban planning as identified in other Western cities. Therefore, it can be reevaluated as the first example of modern urban planning of Korea.

Keywords:

Hansung City Improvement, Modern Urban Planning, Daehan Empire, Planning History

키워드:

한성 도시개조사업, 근대도시계획, 대한제국, 계획사

Ⅰ. 서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9세기 들어 개항과 함께 조선에서도 근대화는 가속화 되었으며, 이와 함께 수도 한성의 공간 구조도 변화를 겪었다. 조선왕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 부근의 육조대로와 종로가 중심이었던 한성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지나며 경운궁 주변으로 중심이 확장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대한제국 건국과 칭제를 통해 자주국임을 알리고자 했던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경운궁 중심의 공간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김광우, 1990). 이후 이태진(1997)의 연구는 당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던 고종 황제가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모방하여 근대적인 수도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시행하였던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임을 주장하였다.

그동안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대한 연구는 주로 역사학계나 건축학계, 행정학계 등에서 주로 이루어져 왔으며, 사업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나 정치사, 또는 건축적인 측면에 한정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계획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계획 분야에서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도시계획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제가 시행한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으로 인정하여 근대적 도시계획으로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소개되지 않고 있다.1)

본 연구는 대한제국에 의해 시행되었던 한성 도시개조사업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증한다. 나아가 비슷한 시기에 근대적 도시정비 사업이 이루어졌던 파리와 워싱턴 D.C.의 사업을 한성 도시개조사업과 비교한다. 이를 통해 근대도시계획 사업으로서의 보편성을 도출하여,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이라는 측면에서 재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본 연구의 범위는 한성, 파리, 워싱턴 D.C.의 정비사업으로 선정하였다. 세 도시의 정비사업을 연구의 범위로 선정한 이유는 첫째, 세 도시의 정비사업이 모두 19세기에 약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세 도시의 정비사업은 전쟁이나 대화재와 같은 재난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닌, 도시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셋째, 세 도시 모두 정비사업을 통해 근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는 점이다.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1895년에서부터 1903년까지 이루어졌던 한성 도시개조사업, 1853년에서부터 1870년까지의 파리 대개조 사업, 1868년에서부터 1881년까지의 워싱턴 D.C. 정비 사업이다.2)

본 연구에서는 근대도시계획으로서의 보편성을 논하기에 앞서, 특정 도시의 모방이라는 ‘특수성’에 초점을 맞춘 관점을 비판하고, 근대도시계획의 일반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근대도시계획의 정의를 정립하고, 연구의 범위인 세 도시들의 도시계획 내용을 살펴봄으로서3) 한성이 갖는 근대도시계획으로서의 보편성을 검증하도록 한다.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통해 진행한다. 우선 한성도시개조사업의 내용과 진행 과정을 기존의 선행연구들과 문헌 등을 통해 정리한다. 두 번째로는 기존의 워싱턴 D.C. 모방설을 살펴 본 후, 이를 비판적으로 검증한다. 세 번째로 근대도시계획 사업의 개략적인 정의를 살피고, 근대도시계획의 요소를 정립한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의 목적에 맞게 도시계획 사업에 있어 근대에 대한 정의를 간략하게 정립하고, 근대도시계획을 구성하는 요소를 사업주체, 사업내용, 도시계획 제도 등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파리 대개조 사업과 워싱턴 D.C.의 정비 사업, 그리고 한성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적 관점에서 비교하여, 한성도시개조사업이 근대도시계획으로서 갖는 보편성을 도출하도록 한다.


Ⅱ. 선행연구 검토

1. 근대도시계획

근대도시계획을 다루고 있는 연구들은 대부분 근대도시계획에 대한 정의나 구체적 속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특정 계획 사례의 근대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근대도시계획의 정의는 다양하며 이에 따라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현재열·김나영(2014)은 16세기에 건설된 프랑스의 도시 르아브르(Le Havre)가 공익에 기초하여 계획되고 건설되었으며, 사업의 주체가 중앙 정부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르아브르의 건설이 근대도시계획의 기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도시계획의 시초는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을 꼽는다.

우리나라에서의 근대도시계획을 다루고 있는 연구는 대부분 일본에 의한 도시계획을 우리나라 근대도시계획의 시초로 본다. 이명규(1994)는 개항 이후부터 근대도시계획제도의 맹아가 형성되었음을 주장하였으나, 오늘날과 같은 도시계획법 체계가 도입된 일제의 1912년 경성시구개정훈령을 우리나라 근대도시계획의 시작점이라고 규정하였다.4)박형용(1997)도 대한제국 시기의 한성도시개조사업이 근대도시계획사의 시초임은 인정하였으나, 근대도시계획은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5) 나아가 김흥순(2007)의 경우 1934년의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오늘날과 같은 토지이용에 대한 규제를 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6)

반면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의 시초로 보는 연구도 있다. 김광우(1990)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한국 근대도시계획사의 출발점으로 보았으며, 이태진(1997) 또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대한제국 정부에서 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시계획으로 보았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근대의 정의와 시기에 대한 논란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근대도시계획에 대한 뚜렷한 정의는 아직까지 없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근대사 및 근대도시계획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나라 근대도시계획의 출발점에 대해서도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2. 한성 도시개조사업

한성도시개조사업에 관한 연구는 그동안 주로 건축이나 역사, 행정 분야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김광우(1990)의 연구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비로소 서울이 근대적 도시계획을 시작했다는 기존의 정설에 반론을 제기한 최초의 연구이다. 그는 김옥균과 박영효의 ‘치도론’을 소개함으로써 이미 대한제국 이전에 주체적인 도시개조사업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후에 박정양과 이채연 등의 관료들에 의해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이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근대화 과정 중 나타난 도시문제에 대한 대응책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이 연구는 특히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덕수궁 일대의 도로체계의 효시가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관료들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힌 최초의 연구로서 의의를 가진다. 이 후에 이어진 이태진(1995)의 연구는 고종 황제에 의해 시행된 도시계획사업의 내용을 당시의 상황과 함께 자세하게 다루었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주장도 이태진(1997)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개조사업의 주요 실무자였던 박정양과 이채연이 워싱턴 D.C.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그리고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개혁의 일환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시계획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고종의 정치적 행위의 일환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는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워싱턴 D.C.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을 하였다.

이 후의 연구들은 세부적인 연구 내용에서는 차이점이 있었으나,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논지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철호(1999)는 워싱턴 D.C.를 모방하고자 하였다는 주장은 받아들였으나, 이태진과 달리 사업 시행의 주체가 친미개화파 관료였다는 관점에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연구하였다. 염복규(2004), 권영상(2004), 정수인(2005), 차세영·임도빈(2010)등의 연구도 각각 다른 관점에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연구하였으나, 모두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이태진의 주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설에 대한 반박은 이정옥(2009)의 연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정옥은 이태진의 연구가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제국의 수도 건설이라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면서, 이태진이 주장한 경운궁 중심의 방사성 도로는 워싱턴 D.C.의 도로망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워싱턴 D.C.는 방사형 도로와 격자형 도로망이 합쳐져 있는 반면,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도로망은 격자형 도로망이 없는 단순한 방사형 도로이므로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발생적 도로라고 주장하였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도시계획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선행연구들은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내용시행 주체, 근대기 서울 공간구조 변화의 일부로서의 의미에 주목하였다. 근대적 도시계획으로서의 의미를 다룬 연구는 김광우(1990)박형용(1997)의 연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연구들마저도 근대도시계획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다루지 않은 한계가 있다.

3. 연구의 차별성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관한 선행 연구는 대부분 역사학계와 건축학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근대도시계획이라는 측면에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다루기보다는, 사업의 주체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 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도시계획 분야에서도 연구가 있었으나,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으로 인정하지 않고 본격적인 근대도시계획은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도시계획개론 등의 입문서에도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대한 소개가 전혀 없다는 것은 도시계획분야에서의 연구가 미진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으로 인정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세계 도시계획사의 흐름에서 근대적 도시계획으로서의 보편성에 대한 연구가 미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사업 주도세력에 의해 워싱턴 D.C.를 모방했다는 기존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둘째,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파리와 워싱턴 D.C.의 근대도시계획 사업과 비교분석 하였다. 셋째, 비슷한 시기의 근대도시계획 사업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근대도시계획 사업으로서의 보편성 측면에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재평가하였다.


Ⅲ. 한성 도시개조사업과 워싱턴 D.C. 모방설의 비판적 검증

1. 한성 도시개조사업

19세기 이전에 서울의 중심공간은 경복궁으로부터 시작하는 육조대로가 중심이었다. 도성의 입지 자체는 풍수지리사상에 맞추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칙을 따랐다. 또한, 건국이념에 따라 유교 사상을 공간계획에 반영하였다. 이로 인해 근대 전의 한양에서 중심공간은 육조대로와, 육조대로와 종로가 교차하는 축, 즉 권력과 상업이 만나는 지점이었다(박경하, 2012).

경운궁과 그 일대가 서울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것은 고종이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부터였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내각은 친미파와 친러파가 주축이 되었으며, 고종은 이들을 통해 수도인 한성을 새롭게 구획하고자 하는데, 이는 당시 내부대신이었던 박정양에 의해 1895년 ‘도로수치와 가가기지를 관허하는 건(道路修治와 假家基地를 官許 하는 件)’을 통해 시작된다. 박정양은 친미파로 분류되던 인물로서, 내부대신에 취임하자마자 치도사업을 중심으로 한성을 개조하는 일을 개시한다. 그는 도심 내부의 중심도로 주변의 가가들을 철거하여 도로를 확장, 신설 한다. 또한, 좌판행위를 금지하고 한성 내외의 도로 정비와 청결 사업을 시행하였다. 1896년에는 도로, 위생, 청소, 호적 등에 관한 내부훈령을 한성부에 내려 각처에 고시하였고, 내부령 제9호(內部令 弟9號)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漢城府 道路의 幅을 規程하는 件)’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내부령 제9호는 오늘날의 종로와 남대문로 전구간의 도로 폭을 규정하고, 도로변에 위치한 상가의 형태를 일정한 기준에 의거해 허가하는 등 가로와 경관을 모두 고려하는 정책이었다.

또 다른 책임자였던 이채연은 한성부의 가가를 철거하고 피해를 보상하여 본격적인 도로 확장 및 신설작업을 추진할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후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도로 체계가 형성되었고, 도로를 정비하는 사업뿐만 아니라 한성을 근대 도시답게 만들기 위한 다른 사업도 시행되었다. 근대 도시의 특징은 방사형 체계 등으로 대표되는 상징성 있는 가로 체계와 가로 체계의 결절지점에 위치하는 상징물, 공원, 그리고 근대적 인프라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897년에는 사대적 질서에서 탈피한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형물인 환구단을 건설하였으며, 1899년에는 한성 내 최초의 공원인 탑골공원이 만들어 진다. 1898년에는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고, 전차, 전등, 수도, 전화 등의 근대적 인프라를 설치하는 일도 시작되었다(이태진, 1997). 첫 전차는 1899년 5월에 개통하였으며, 1900년 4월에는 가로등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또한, 일반적인 상업적 생산시설은 아니었으나, 총기제작소와 같은 관영공장들도 1900년대까지 계속해서 건설되었다.

2.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워싱턴 D.C. 모방설

앞서 밝혔듯이 근대의 한성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설은 이태진(1997)을 통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주장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고종의 명을 받고 사업을 시행하였던 인물들인 박정양과 이채연이 친미 개화파였으며, 미국에 외교관으로 체류하며 미국 도시, 특히 공사관이 있던 워싱턴 D.C.를 보고 배웠을 것이라는 이유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양에 의해 한성 판윤으로 임명된 이채연 또한 미국에서 외교관으로서 1887년에서 1893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주로 체류하였다. 즉 당시 개조사업에 있어 주요 인물들이 모두 워싱턴 D.C.의 체류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있어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통해 경운궁 앞을 통과하는 방사형 도로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워싱턴 D.C.의 방사형 도로 체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가가를 철거하고 도로를 넓히는 등 기존 도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새로운 도로의 신설도 함께 추진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경운궁 앞의 도로 형태는 기존의 한성 도로 체계에서는 찾기 힘든 방사형과 유사한 형태로, 워싱턴 D.C.에서 이식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워싱턴 D.C.에 대한 박정양의 기록에는 워싱턴 D.C.가 방사형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박정양이 방사형 구조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며, 한성을 개조했을 때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셋째, 당시의 독립신문 등의 보도에서 워싱턴 D.C.의 시장이었던 쉐퍼드(Alexander Robey Shepherd)를 사업 담당자였던 이채연이 본받을 인물로써 언급한 것이다.7) 이를 두고 이태진(1997)은 박정양과 이채연 등이 워싱턴 D.C.를 모방하여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도로망을 구축하기로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워싱턴 D.C.를 모방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타당할 수 있으나, 이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도시계획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워싱턴 D.C. 모방설은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도시계획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사업을 담당하였던 관료들과 대외적으로 근대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고종의 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고종이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과정 중에, 대내외적으로 근대국가임을 보여주고자 미국 체류 경험이 있던 관료들을 통해 미국의 수도를 ‘모방’하였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워싱턴 D.C. 모방설은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갖는 근대도시계획으로서의 보편성을 간과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보편성의 간과는 결국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근대도시계획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위해서는 우선 워싱턴 D.C.을 모방했다는 설을 검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3. 워싱턴 D.C. 모방설의 비판적 검증

워싱턴 D.C. 모방설은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이정옥(2009)은 워싱턴 D.C.의 가로체계가 격자형 구조를 바탕으로 방사형 구조가 혼합되었음에 주목하여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의해 형성된 경운궁 앞의 방사형 구조는 워싱턴 D.C.의 구조와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격자형 도로가 전제되지 않았으므로 경운궁 앞의 방사형 구조는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은 도로망은 전근대시기에도 발견할 수 있으므로 근대적 도시계획의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정옥이 지적한 바와 같이, 워싱턴 D.C.는 격자형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방사형 구조를 도입하였으나, 한성은 일제에 의한 시가지 계획이 시작되기 전까지 격자형 구조를 갖추지 못하였다(이정옥, 2009). 즉 도시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일부가 유사하다고 하여 도시 전체를 모방하고자 하였다는 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또한, 형태적인 측면을 보더라도 워싱턴 D.C. 모방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방사형 구조는 중앙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모양을 말한다. 이러한 방사형 구조는 바로크 도시의 계획에서 많이 차용되었는데, 방사형 구조의 속성 상 방사형 구조의 중심 지점으로 시선과 동선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선과 동선이 집중되는 지점에는 일반적으로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시설을 배치하였다.

워싱턴 D.C.를 설계하는데 있어 랑팡(Pierre Charles L'enfant)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을 참고하였고, 신생 독립국이었던 미국의 수도에 맞는 상징성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구획의 편리함과 효율성이 있는 격자형 구조를 바탕으로, 상징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사형 구조를 결합하였다. 그림1에서 볼 수 있듯이, 방사형 구조의 중심 지점이 되는 곳에는 내셔널 몰 (National Mall)과 같은 공원이나 광장, 혹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의회 의사당(Capitol), 백악관(White House) 등을 위치시켰다. 즉 방사형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형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방사형 구조의 중심점이 상징적인 장소이거나 건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Fig. 1.

Street structure of Washington D.C. and important facilitiesSource: Library of Congress, http://lccn.loc.gov/88694159

그림2는 1907년 발행된 최신경성전도에 주요 가로들과 당시 중요한 시설들을 직접 표시한 도면이다. 흰색 점은 방사형 도로의 중심점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경운궁 앞에 위치하고 있다. 집중되었다고 보기에는 4개의 도로들만이 교차하고 X자 형태로 교차하고 있으며, 곧게 뻗은 길도 아니다. 특히 방사형을 이루고 있다는 도로들은 한성 도시개조사업 시기에 정비되거나 신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게 뻗지 않은 형태로 중심점을 향하고 있다.

Fig. 2.

1907's Map of Kyungsung (edited)Source: Seoul map Website, http://gis.seoul.go.kr/Information/Pavilion.jsp#

워싱턴 D.C. 모방설은 방사형 형태의 불완전성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앞서 밝혔듯이 워싱턴 D.C.와 같이 바로크식 도시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도시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방사형 구조 자체뿐만이 아니라 중심점에 위치한 장소나 건물이다. 경운궁 앞의 도로 중 4개는 분명히 경운궁 앞으로 모여진다. 그러나 부분도인 그림3을 살펴보면 나타나듯이, 경운궁 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위치하지 않고 있으며, 경운궁 앞에 도로가 모이는 지점에는 특별한 상징물이나 공원, 혹은 광장 등이 없고 조각난 작은 필지들만이 있을 뿐이다.

Fig. 3.

1907's Map of Kyungsung (partial view)Source: Seoul map Website, http://gis.seoul.go.kr/Information/Pavilion.jsp#

이와 같은 방사형 구조 중심점에 있어 중요 상징물이나 시설물의 부재는 환구단의 위치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즉위식을 올렸던 장소로, 기존에 중국과 맺었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만든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환구단의 위치는 방사형의 중심점과는 일직선상에 위치하지도 않았으며,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다.

만약 워싱턴 D.C.의 방사형 체계를 한성에 도입하고자 하였더라면, 경운궁 앞의 장소는 광장과 같이 보다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을 것이며 환구단의 위치도 최대한 방사형 구조의 중심점에 위치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통치력은 건국 이전이나 말기에 비해 강하였으며,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빠른 시간 내에 추진되었다. 이로 인해 가가의 경우 철거를 하거나 보상을 통해 사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없도록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구미 출신의 실무자들도 함께 하였기 때문에, 기술의 부족으로 인하였다고 보기도 힘들다.

위와 같은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박정양의 기록 등에는 워싱턴 D.C.에 대한 묘사가 있지만, 시카고 등 다른 도시에 대한 묘사도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 D.C.에 대한 서술이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또한, 워싱턴 D.C. 모방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당시 언론들의 보도 내용도 모방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부족하다. ‘독립신문’에서는 한성도시개조사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논설 등을 통해 실무자였던 이채연 등을 격려하고 독려하였다. 특히 1870년대에 워싱턴 D.C. 정비 사업을 저돌적으로 수행하였던 쉐퍼드 시장과 설계가였던 랑팡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쉐퍼드는 도시를 설계한 것이 아닌 정비 사업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한성은 단순한 정비 사업을 넘어 구조적인 변화가 있었으므로, 워싱턴 D.C.의 시장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은 미국에 체류하였던 서재필 등이 창간하였고, 친미적인 색체를 띄었던 언론이었으므로, 미국의 도시를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워싱턴 D.C.를 모방하거나 참고하였다는 내용의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4. 소결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워싱턴 D.C.의 형태를 모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부족하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을 통해 형성된 가로체계는 워싱턴 D.C.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로체계의 기능적인 면 또한 차이가 난다. 또한, 직접적으로 형태를 모방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무자들이었던 박정양과 이채연 등이 워싱턴 D.C.에서 체류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워싱턴 D.C.의 도시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기 보다는, 워싱턴 D.C.에서 이루어졌던 근대 도시화 사업의 영향을 받아 이를 한성에 적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Ⅳ.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근대적 보편성 분석

1. 근대도시계획의 정의

근대도시계획은 근대에 이루어진 도시계획 사업, 혹은 근대적인 도시를 만드는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도시계획의 정의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근대’라는 시기를 규정하는 기준이다. 근대에 대한 시기적 정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러나 ‘중세와 현대 사이’의 시대를 근대로 규정한다는 것이 공통적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도시는 생산보다는 소비나 교환이 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인해 도시는 생산 기능까지 갖춘 공간으로 변모한다. 생산 기능은 도시에 더 많은 인구를 끌어들였고, 이는 곧 많은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들이 행해졌으며, 기존의 중세적 생활 방식을 지탱하던 도시의 구조를 새로운 생활 방식에 맞게 고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근대도시계획은 기존의 사회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생활 방식을 수용할 수 없게 된 기존의 도시 구조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계획 및 사업, 혹은 새로운 사회 구조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계획 및 사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워싱턴 D.C. 정비 사업

워싱턴 D.C.는 신도시로 계획이 되었으며, 최초 계획이 된 후 약 100년에 걸쳐 완성이 되었다. 근대 이전에 형성되고 근대에 들어 정비사업을 거친 한성이나 파리와는 달리, 워싱턴 D.C.는 형성과 정비사업이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림4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의 전반적인 관리 상태는 좋지 않았다. 포장되지 않은 길, 운하에다가 가로등조차 없었기에 워싱턴은 방문자들에게 위험한 도시로 소문이 났었다. 이에 워싱턴 D.C.에서는 1850년대까지 여러 차례 도시를 개선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었으며, 이는 주로 도시의 위생 개선과 도로의 개선에 관한 계획들이었다. 시 정부에서는 가로등을 설치하고 길을 포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인해 도로 포장은 일부 구간에서만 이루어졌고, 가로등도 가스가 없어서 대부분 작동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은 1860년대를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Fig. 4.

Washington D.C. street, 1865Source: Library of Congress, http://www.loc.gov/pictures/item/cwp2003006538/PP/

남북전쟁 후 워싱턴의 인구는 3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1860년 61,000명이었던 인구는 1864년에 200,000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하였다. 증가하는 인구와 이에 따른 인프라 부족 및 위생 악화 등은 워싱턴 D.C.의 위상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위기를 느끼게 된 시 정부에서는 1870년 마침내 의회에서 랑팡의 원래 계획이었던 넓은 에비뉴와 공원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공공 통행로에 대해서도 토지 소유자들이 유지 관리할 것을 강제함으로써 연방정부의 부담은 줄고 환경은 개선되기 시작하였다(Historic American Building Survey, 1933). 또한, 이 시기에 공병대 준장이었던 미클러(N. Michler)가 도시의 위생 개선 사업을 맡아 공공건물, 공원, 길, 그리고 수도관 등에 대해 사업을 시작하면서 워싱턴 D.C.의 상황은 개선되기 시작되었다.8)

1871년에는 공공사업 위원회(Board of Public Works)를 통해 본격적인 정비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동안 원래 3개로 나누어져 있던 워싱턴 D.C.의 행정체계는 통합이 되었고, 도로 정비를 비롯한 정비 사업의 권한을 공공사업 위원회에서 모두 갖게 되었다. 앞서 독립신문에서 언급되었던 쉐퍼드는 이 위원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되었고,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사업을 신속하게 진행하였다. 쉐퍼드는 400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정비 사업을 시행하고자 하였고, 1871년부터 1874년까지 많은 공사를 진행하였다(Maury, 1971/1972).

정비 사업에서는 ‘비오는 날에는 걷기 힘들고, 마른 날에는 먼지가 날리는 (Cooke,1989; 291:9-14)’ 도로의 포장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가로 환경 정비를 시행하여 공유지와 사유지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도로와 도보를 가로수를 통해 분리하였다. 또한, 총 연장 198km에 달하는 하수도를 건설하고 워싱턴 운하를 매립하였으며, 가스관을 설치하는 등 근대적 인프라를 설치하였다. 3년의 기간 동안 공공사업 위원회는 워싱턴 D.C. 시내에 100헥타르에 달하는 보도와 146헥타르의 면적에 달하는 도로를 포장하였다(Howe, 1900). 건축에 관한 규제는 도시의 정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했었는데, 주로 건축물의 높이와 공유지·사유지의 구분에 관한 규제였다. 이와 같은 도시 정비는 책임자가 계속 바뀌면서도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1870년부터 건설한 기차역과 함께 워싱턴 D.C.를 근대도시로 만들었다.

3. 파리 대개조 사업

1800년대 초에서 1850년 사이 파리의 인구는 약 548,000명에서 1,053,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파리의 가로 체계는 여전히 중세 도시의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림5에서 보이듯이 가로는 비좁아 통행이 어려웠으며, 포장도 잘 되어있지 않았고 채광과 통풍이 잘 되지 않았다. 이는 전 시대에 만들어진 하수도와 함께 도시의 위생을 악화시키는 요소 중 하나였다.

Fig. 5.

Street of Paris before Hausmann PlanSource: Un Jour de plus à Paris, http://www.unjourdeplusaparis.com/en/paris-reportage/charles-marville-photos-de-paris-avant-haussmann

1852년에 쿠데타를 통해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3세는 1853년에 오스만을 센(Seine)의 도지사로 임명하고 오스만에게 파리를 개조할 것을 명령한다. 이를 통해 오스만에 의한 파리 대개조 사업이 시작되었다. 초기에 사업의 재정은 파리시와 중앙 정부 모두가 부담하였으나 점차 파리시가 단독으로 부담하게 되었는데, 사업은 주로 가로의 정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는 파리의 좁은 도로가 정치적 소요 사태가 발생할 시에 공권력 투입이 어려웠다는 점을 비롯하여, 인구가 늘어난 파리에 좁은 가로는 도시의 기능이 원활히 수행되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위생에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가로의 정비는 오스만의 사업 기간 내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당시 파리는 1855년에 파리 박람회를 앞두고 있었으며, 나폴레옹 3세는 파리의 위용을 보여주고자 넓은 대로와 함께 정비된 파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대개조 사업 동안 파리의 동-서 축과 남-북 축의 가로들이 정비 되었으며, 이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지점은 파리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낡은 건축물 철거를 통한 새로운 가로의 신설과 기존의 가로를 연장하거나 확장 하는 등의 사업이 시행되었다(Gideon, 2005). 또한 가로들을 당시 중요한 시설이었던 기차역과도 연결이 되도록 하여 인프라의 사용도 원활하도록 도시 체계를 개선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은 주요 시설 주변을 정비하고, 극장을 세우고 공원을 건설하는 등 근대 도시에 있어 중요한 시설들을 마련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업은 하수도 체계의 정비였다. 오스만이 사업을 시작 하였던 1850년대의 파리는 여전히 중세의 하수도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하수도 체계에 대한 보수 및 개선은 1857년에 시작되었고, 1870년에는 348마일의 연장에 달하는 하수도가 완성되었다.

근대도시계획에서 오스만 계획이 시초로 평가 받는 원인 중 하나인 건축물에 대한 규제도 이루어졌다. 1855년에는 메인 파사드에 대해서 각 가구에 동일한 건축선과 발코니의 연속성, 동일한 코니스와 지붕을 강제하는 규제가 시행되었고, 1860년에는 건축물의 입면을 규제하는 시행령도 발효되었다. 1870년에 오스만이 물러나기까지 파리는 방사형 체계의 도로망과 기차역과 같은 주요 시설물 연계, 하수도와 같은 근대적 인프라 설치 작업 등을 거쳐 근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

4. 근대도시계획의 특징과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근대적 보편성 분석

근대도시계획의 특징은 다양한 방면에서 나타난다. 우선 공익성이라는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시행되었으며(실질적 합리성), 사업의 주체는 국가의 행정체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으나 법령에 근거한 공공이 주체가 되었다. 사유 재산 개념의 발현으로 인해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근대도시계획 사업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이다(절차적 합리성). 또한, 도시 내의 건축물에 대한 규제를 마련하였으며 계획에 있어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고려하고, 발전된 과학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인프라들이 구축되기 시작했다(과학적 합리성).

따라서 근대도시계획은 실질적 합리성·절차적 합리성·과학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보편성은 공익성, 사업의 주체,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 사업을 위한 법적 제도 및 규제, 사업 내용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공익성

독립신문의 기사에서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듯이, 한성의 정비 사업 중에 시행한 도로 정비 사업은 인마(人馬)의 소통을 원활히 하여 경제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과 함께 위생 개선 등으로 인하여 공공이 이로울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 또한 공원과 같은 시설을 설치하는 등 특정 계층만이 아닌 공공을 위하는 사업이 있었다. 즉 단순히 절대군주가 자주국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혹은 근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업을 시행하였다기 보다는, 정비 사업이 갖는 공익성에 대한 고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이 전제군주정이었던 대한제국 시기에 시행하였으므로 전근대적 성격을 띠며, 어디까지나 권력의 ‘과시’용이라는 인식과는 상반된다.

대한제국과 달리 미국은 최초의 현대적인 민주주의 국가였으며, 이로 인해 워싱턴 D.C.는 처음부터 ‘공유지’라는 개념의 토지가 존재하였다. 또한, 계획 단계에서부터 광장이나 공원과 같은 공공공간을 주요 결절지마다 배치하도록 하였으며, 특정 계층을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을 위해 계획되었다.

이는 제국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이루어진 대개조 사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파리 대개조 사업은 도시 전체의 개선을 위해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물론 이 과정 중에 주택의 철거 등으로 인하여 빈민들은 갈 곳이 없어지거나, 공원과 같은 시설의 경우에도 부유층을 위한 것이 먼저 지어지는 등 차별적인 성격도 나타났다. 그러나 도시 내의 특정 계층을 몰아내거나 특정 계층에 혜택을 주려기보다는, 도시 전체의 원활한 기능을 위해 사업이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공익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2) 사업의 주체

근대 국가에서는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계획 과정에 있어 효율성을 위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가 동시에 참여하였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자금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직접적으로 지급하였으나, 사업의 시행은 지방 행정구역 중 하나인 한성부에서 담당을 하였다. 각종 비용 지출과 관련하여서는 중앙정부가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 사업의 실무는 한성 판윤이었던 박정양과 한성 부윤이었던 이채연을 통해 진행되었다. 또한, 개조사업의 시작에 발효된 내부령의 경우 한성부의 내부령이었다. 즉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주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두 주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D.C.의 경우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다양한 주체들이 관할권을 갖고 있었고, 이는 사업의 진행에 있어 추진력을 저하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다양한 행정 주체들9)간의 사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위생 개선 사업은 지지부진하였으나, 이는 1870년대 쉐퍼드 시장 시기에 공공사업 위원회를 통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도 사업의 추진 자체는 지방 정부인 워싱턴 D.C.의 공공사업 위원회가 하였지만, 예산이나 법적 지원은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체제로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비록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에 의해 이미 근대적인 법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법제는 사업에 있어 관할권을 명확히 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중앙정부와 파리 시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사업이 진행되었다.

3)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은 사유재산권의 인정 여부와 직결되며, 사유재산권의 인정은 근대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한성 도시개조사업 당시 철거·정비 대상이었던 가가의 소유주 혹은 거주자들이나 사업 시행 지역 내의 토지 소유주에 대한 보상 문제와 관련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指令存案(지령존안)에는 “道路修治(도로수치)와 假家基址(가가기지)를 官(관)에서 허가하는 건은 請議(청의)한대로 각의에서 결정이 되었으나 小㨾假家(소양가가)의 금지에 관해서는 크기에 따라 그에 상당한 보상금을 수리비 예산에서 지급토록 하라”는 指令(지령)10)이 남아 있다. 이는 일방적인 철거가 아닌 공공에 의한 보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1893년부터 1905년에 이르는 기간에는 지계제도와 가계제도라는 지권제도에 의해 토지 및 가옥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였다(정우형, 2002).

미국의 경우 수정헌법 제 5조에서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을 공익목적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김용창, 2012)라고 밝히고 있을 만큼 사유재산의 보호에 있어 엄격하였다. 워싱턴 D.C.의 마스터 플래너(Master Planner)였던 랑팡은 사유지 철거를 문제로 갈등을 빚다 결국 사임했을 정도로, 정비 사업에 있어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토지수용제도는 파리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오스만 사업시행 이전인 1810년에 토지수용에 대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의해 프랑스 토지수용 절차는 행정적 절차와 법률적 절차로 구분되어 진행되었고 보상규정이 명시되었다. 공공에서 토지수용을 시행할 경우에는 ‘공익성’을 선언해야 하고 이에 따라 수용절차가 진행되도록 하였던 것이다(최민아, 2013). 당시 토지수용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 제도는 엄격히 지켜졌다.

4) 사업을 위한 법적 제도 및 규제

도시계획에 있어 법적 제도와 규제 사항은 근대에 들어 구체적이고 체계를 갖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성 도시개조사업 당시 나온 “도로수치와 가가기지를 관허 하는 건”은 1895년에 박정양이 발포한 법령이었으며, 1896년의 내부령 제9호 “한성부 도로의 폭을 규정하는 건”은 한성부에서 발포한 법령이었다. 즉 법령 제정을 통해 법령에 의거하여 사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내부령 9호의 경우 도로의 폭 및 도로변에 접한 가가의 높이 및 입면 등의 형태를 규제하였으며, 일종의 지구단위계획과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전우용, 2008), “기둥 높이는 9척(약 2.7m)으로 하고 요철이 없게 일자로 배치하며 지붕은 초가여서는 아니되게 한다”(우동선, 2003)는 등의 세부적인 사항을 다루고 있었다.

워싱턴 D.C.의 경우 도시 정비 사업을 위한 법령이나 규제 등은 모두 연방 정부의 의회나 시 정부의 의회를 통해 발효되었다. 이는 주로 예산의 집행이나 사업의 시행에 관한 법령이었으며, 적법한 절차를 통해 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작용하였다. 건축 관련 규제로는 앞서 소개하였듯이 건축물의 높이를 규제하거나, 사유 건축물들이 공공 공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들이 있었다.

각종 규제들은 파리 대개조 사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스만이 대개조 사업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수용 제도가 이미 정립되어 있어 보상에 걸리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건축물의 높이나 입면의 형태 등을 규제하는 제도들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제도들은 모두 프랑스 혁명 이후 성립된 근대적 법제를 통하여 만들어진 제도였다.

이와 같은 규제들은 경관이나 원활한 통치를 위한 전근대적 측면도 있었으나, 채광이나 환기, 통행의 효율성 등 근대적 합리성에 기반 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측면을 가진다.

5) 사업의 내용

한성은 중세 도시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전염병이나 하수도(청계천)의 관리 문제 등이 누적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대한제국 건국 이전 19세기에 두 차례 발병한 콜레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성의 위생 개선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가가의 난립으로 인해 좁아진 도로는 도시 내부의 통행에 있어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로의 정비는 한성 도시개조사업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사업이었다. 가가를 철거하고 길을 넓히는 등의 사업을 통해 한성의 위생과 미관은 개선되었으며, 하수도를 정비하고, 오물을 수집하는 장소와 시설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위생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인식에 따라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원이나 극장과 같이 시민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전력 생산 시설을 비롯하여 전기와 전차도 도입이 되었다.

워싱턴 D.C.는 계획도시로서 새롭게 만들어졌으나, 예산의 부족으로 인하여 도시의 형성이 오랜 시간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의 형태에 대한 계획이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내부의 정비 상태는 열악하였다. 가로들은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빴으며, 건물들이 도로를 침범하는 등 도시의 가로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로들은 포장이 되었고, 사유지와 공유지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가로수를 식재하였다. 도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가스관을 설치하고 공원과 광장도 대대적인 정비를 하였다. 또한, 근대 도시의 인프라로서 중요한 철도역도 설치하였고, 위생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받던 워싱턴 운하를 매립하였으며, 대대적인 하수도 정비를 시행하였다.

도로 정비는 파리 대개조 사업에서도 핵심적인 요소였다. 파리의 중세 도시에 적합한 규모의 가로들은 늘어나는 인구와 변화한 사회구조를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오스만 대개조 사업에서는 이러한 가로들을 확장하는 것이 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기존 가로의 확장뿐만이 아니라, 도시 내에서의 통행을 원활하게 하고, 새로운 시설이나 행정구역과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한 가로의 신설도 진행되었다. 상·하수도와 가스관과 같은 근대적 인프라도 이 시기에 설치가 시작되었으며, 공원이나 극장과 같은 시설들도 만들어졌다.

5. 소결

이상에서 살펴본 세 도시는 화재나 전쟁과 같은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도시계획 사업이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적 요구에 맞게 도시에도 변화가 필요하였고, 그 필요에 의해 도시계획 사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도시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표1에서 요약되어 있으며, 보편성은 다음과 같다.

Comparison of the Modern Urban Planning in Hansung, Washington D.C. and Paris

우선 세 도시에서 모두 계획 사업 과정에 있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였고, 이에 대해 보상을 함으로써 사업을 시행하였다. 한성의 경우 비록 정확한 절차와 액수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철거하는 가가의 주인에게 금전적 보상을 해주라는 지시사항이 담긴 기록이 남아있다. 워싱턴 D.C.의 경우에는 사유지에 대한 보상 문제로 인해 계획 전체가 멈추고 설계자가 사임할 정도로 토지 소유권을 철저히 보장하였다. 파리의 경우에도 공공에 의한 토지수용이라는 근대적인 방식을 통해 사업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업의 주체 또한 중앙 정부뿐만이 아닌 지방 정부인 시 정부도 함께 참여 하였다. 즉 세 도시 모두 두 개 이상의 주체가 개입된 것이었으며, 전문가를 통해 계획과 사업을 실행하였다. 한성에서 사업을 수행하였던 관료들은 미국에서의 체류 경험으로 근대 도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전문가로 인정을 받았기에 사업을 맡게 되었다. 워싱턴 D.C.의 경우 건축가에 의해 설계가 되었고, 토목공사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였던 미 육군 공병대에 의해 정비가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파리의 경우에도 오스만 남작을 위시한 전문가 집단에 의해 사업이 시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사업 내용을 보면 세 도시는 모두 근대 도시화가 목표였다. 도시가 생산의 공간이 되면서 도로의 효율성과 경제성에 대한 고려가 시작되었고, 이는 도로 정비 사업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도시의 위생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이루어지면서 전염병이 도시의 환경과 연결된다는 인식이 생겼고, 이는 하수구 등의 인프라 구축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한성에서는 배수로를 만들고, 폐기물을 버리는 장소를 따로 정했다. 워싱턴 D.C.의 경우에도 하수구를 만들고, 사유지 주변을 청소하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었으며 전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받았던 운하를 매립함으로써 위생을 개선하였다.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도 하수구 등의 설치를 통해 도시 위생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공원과 철도, 전기 등의 시설도 모두 세 도시가 계획사업을 통해 설치한 근대적 시설이었다. 이와 같은 인프라 구축 사업은 고대 도시에서도 이루어졌었으나, 산업화 시기에 적합한 근대적 시설을 도입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업들과는 차별성을 갖는 근대적 인프라 시설의 설치였다.


Ⅴ. 결론

19세기의 개항과 함께 조선에서도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수도인 한성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고종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입지한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공간체계를 버리고,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공간체계를 한성에 만들었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1895년에 시작되어 1903년까지 시행되었다. 이 시기 동안 한성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기존의 좁고 불결한 도로들은 위생이 개선되고 확장되는 등 정비되었으며, 도로를 점거하였던 건물들은 법령에 의거하여 철거되거나 미적으로 개선되었다. 지방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지방 행정부였던 한성부에서 시행하였으며, 도시 환경의 개선이 공공의 이익과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하에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사업을 통하여 한성은 근대화된 국가에 적합한 수도로 거듭나기 시작하였다. 한성의 근대도시계획 사업이 워싱턴 D.C.를 모방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워싱턴 D.C.와 한성의 형태적 차이점 및 여러 가지 정황들은 한성이 워싱턴 D.C.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라기보다는, 워싱턴 D.C.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도시 정비 사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성 도시개조사업의 근대적 보편성은 당시 도시계획 사업을 시행하였던 세 도시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한성, 워싱턴 D.C., 파리는 19세기에 근대도시계획 사업이 이루어진 도시로서, 재난과 같은 불가피한 원인이 아닌 사회적 변화와 당시의 열악한 도시환경을 개선하고자 도시계획 사업을 진행하였다. 세 도시의 정비 사업은 사업 주체가 중앙정부만이 아닌 지방정부가 참여하여 근대적 제도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 사업이 기본적으로 공공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 토지 수용에 있어 토지 사유권을 인정한 근대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것, 사업 내용에 있어 근대적 인프라 구축과 함께 도시를 개선하고자 하였다는 것 등이 공통점을 가진다. 즉 한성의 도시개조사업은 ‘합리성’의 추구라는 점에서 다른 근대도시계획이 갖는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은 일본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근대도시계획으로 인정되고 있는 서구의 도시계획과 비교하였을 때 근대도시계획으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성 도시개조사업은 근대적 도시계획으로서 보편성을 갖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시계획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Acknowledgments

* 본 논문은 2014년 10월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대한제국기 한성도시개조사업의 재평가: 근대도시계획으로서의 보편성을 중심으로」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임.

Notes

주1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의 도시계획론 5판(2009)에서는 영국의 공중위생법을 근대도시계획제도의 시초로 소개하며, “가로 폭, 건축선 위치, 건축물 높이 등을 규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또한, “조선시가지계획령”만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도시계획제도로 소개하고 있으며, 한성의 개조사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주2 세 도시의 정비 사업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급격히 진행되었다가 이후에 다른 인물에 의해 서서히 진행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었던 시기를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
주3 이에 따라 계획활동에 있어 ‘의도’를 배제하고 논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계획 활동에 깔린 근본적인 정치적 배경을 설명하기 보다는, 계획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도시의 모습을 ‘의도’로 파악하고 사업의 내용을 ‘결과’로 보고자 하였다.
주4 이는 도시계획의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계획은 제도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도시계획의 내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주5 박형용은 한성도시개조사업 시기의 도시계획이 ① 외세의 침탈을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②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도 아니었고 ③ 도시문제의 기본인 토지문제에 소홀하였음을 이유로 근대도시계획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① 침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사업은 없었다는 점 ② 개항기의 한성에서는 근대화 현상으로 인구 과밀로 인한 위생악화, 주택부족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였고, 해결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시행하였다는 점 ③ 이미 대한제국에서는 지권제도를 통해 토지 및 가옥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하였고, 공공에 의한 보상제도가 있었다는 점 등을 간과하고 있다.
주6 분명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용도지역제가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시초이다. 그러나 도로 정비 및 건축규제만을 다루는 것은 19세기 말의 도시계획에 있어 보편적인 현상으로, 근대도시계획의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주7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Editorial, 1896.10.15

“We earnestly hope that Mr. Ye Cha Yun will be to Seoul what L´enfant and Governor Shepherd were to Washington the city which he desires to take as an example for the improvement of Seoul.”

주8 쉐퍼드 이전에 정비사업을 시작하였던 공병대 준장 Michler의 보고서(United States Bureau of Topographical Engineers, 2010)에는 1860년대 워싱턴 D.C.의 상황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주9 1860년대에만 해도 당시 행정은 워싱턴 시(Washington City), 워싱턴 군(Washington County), 연방 정부(Federal Government), 워싱턴 D.C. 행정부 (the governing bodies of the District) 등이 나누어 맡고 있었다.
주10 指令存案 제2책. 발신자: 內閣總理大臣 金弘集, 수신자: 內部大臣 朴定陽, 1895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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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Street structure of Washington D.C. and important facilitiesSource: Library of Congress, http://lccn.loc.gov/88694159

Fig. 2.

Fig. 2.
1907's Map of Kyungsung (edited)Source: Seoul map Website, http://gis.seoul.go.kr/Information/Pavilion.jsp#

Fig. 3.

Fig. 3.
1907's Map of Kyungsung (partial view)Source: Seoul map Website, http://gis.seoul.go.kr/Information/Pavilion.jsp#

Fig. 4.

Fig. 4.
Washington D.C. street, 1865Source: Library of Congress, http://www.loc.gov/pictures/item/cwp2003006538/PP/

Fig. 5.

Fig. 5.
Street of Paris before Hausmann PlanSource: Un Jour de plus à Paris, http://www.unjourdeplusaparis.com/en/paris-reportage/charles-marville-photos-de-paris-avant-haussmann

Table 1.

Comparison of the Modern Urban Planning in Hansung, Washington D.C. and Paris

공익성
Public Benefits
사업 주체
Participants
토지 수용
Expropriation
제도 및 규제
Regulations
사업 내용
Contents
한성 Hansung (1895-1903) •‘인민’의 개념 등장
• Consideration of 'People'
•도시민 전체의 편익을 고려
•Benefit on all citizens
•대한제국 정부 (중앙 정부)
•The central government
•한성부 (지방 정부)
•Local government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철거에 대한 보상을 함
•Compensation for private property
•건축물의 높이, 지붕의 재질 등 규제
•Regulation on building height ·roof materials
•도로 정비, 하수도 정비 및 근대적 인프라 구축
•Street improvement, construction of modern infrastructure
워싱턴 D.C. Washington D.C. (1868-1881) •공공시설에 집중
•Priority on public facility
•특정 계층을 위한 정비가 아닌 도시 전체를 정비
•Improvement for commons
•연방 정부 (중앙 정부)
•The central government
•워싱턴시 정부 (지방 정부)
•Local government
•헌법에 따른 소유권 보장 및 보상
•Protection of property and compensation based on the Constitution
•건축물의 높이, 위치, 입면 등 규제
•Regulation on building height ,location, facade
•도로 정비, 하수도 정비 및 근대적 인프라 구축
•Street improvement, construction of modern infrastructure
파리 Paris (1853-1870) •특정지역이 아닌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진행함
•Improvement on the entire area of the city
•프랑스 정부 (중앙 정부)
•The central government
•파리시 정부 (지방 정부)
•Local government
•‘공익성’을 바탕 으로 한 토지 수용제도에 의거하여 보상
•Compensation for private property based on 'public good'
•건축물의 높이, 입면의 형태 등 규제
•Regulation on building height and facade
•도로 정비, 하수도 정비 및 근대적 인프라 구축
•Street improvement, construction of modern infrastru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