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Planning Association
[ Article ]
Journal of Korea Planning Association - Vol. 54, No. 1, pp.80-94
ISSN: 1226-7147 (Print) 2383-9171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19
Final publication date 28 Jan 2019
Received 31 Jul 2018 Revised 02 Jan 2019 Reviewed 13 Jan 2019 Accepted 13 Jan 2019
DOI: https://doi.org/10.17208/jkpa.2019.02.54.1.80

진주 지역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성과 그 변천 : 근현대(조선말기~현대)시기를 중심으로

하혜경** ; 김한배***
A Study on the Transformation of Places for Local Social Movement Epicenter in Jinju City : During the late Joseon and Japanese Colonial Period
Ha, Hye-Kyung** ; Kim, Han-Bae***
**Ph. D. Candidate,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 University of Seoul hhk1425@hanmail.net
***Professor,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 University of Seoul hbkim@uos.ac.kr

Correspondence to: ***Professor, Department of Landscape Architecture, University of Seoul (Corresponding Author: hbkim@uos.ac.kr)

Abstract

Most previous studies on social movements have focused on the “Movement” itself, and there have been no cases of “placeness studies” of their social movement epicenters. Therefore, this study intends to extend the study area to the epicenter of the social movement in Jinju and to read the locality. Research methods comprised literature studies, where in historical data and newspaper records of the Jinju area were used, and in-depth interviews of the local history and culture experts as well as the local residents.

This study selected three places of social movements from the Joseon Dynasty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at are representative of change and interpreted the changes to their placeness. The theoretical basis for this study is Relph(1976)’s “Place Identity”, which was complemented conceptually with research by Lefebvre(1991) and Löw(2008)’s “The Viewpoint of Social Construction” and Augé(1995)’s “Non-Places”. Prior research has distinguished the major factors that make up placeness in social movement places into “Physical Appearance“, “Social Activity”, and “Place Meaning”.

The sites selected for in-depth research included a place that still preserves the social movement place to this day (Yeongnam Pojeongsa Gatehouse); a place where the epicenter has been transformed outwardly but its original purpose is still maintained (Jinju Theater); and a place that has so completely and destructively transformed its place that its placeness is no longer remembered (Marketplace in Front of the Guesthouse). The transformation and destruction of social movement places in modern cities subjugated by capitalism have been perceived widely as “development” and this perception has led these places to lose their placeness. This research is significant because it examines the original form, changes in and perceptions of locals toward social movement places that have been covered insufficiently in past research, and expands this examination into a study on place.

Keywords:

Placeness, Place Identity, Local Social Movement, Social Movement Epicenter, Jinju City

키워드:

장소, 장소정체성, 지역사회운동, 사회운동 진원지, 진주

Ⅰ. 서 론

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1990년대 이후 세계화, 지방화, 정보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사람, 정보, 자본이 경계 없이 움직이는 ‘탈지역화’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환경계획분야가 지역성(locality, 로컬리티)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차철욱(2016)은 우리가 생활하는 ‘여기’를 장소성(삶터), 국지성(지역성), 위계성(지방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라고 규정하였다(차철욱, 2016: 310). 삶터로서 형성된 ‘장소성’은 특정 공간단위에 나타나는 ‘지역성’을 논하기 위한 기층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 지역의 지역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장소성에 관한 연구가 우선되어야 함을 뜻한다.

지역성을 형성하는 요소로는 크게 자연지형, 도시구조와 같은 ‘물리적 요소’와 지역의 역사·사회적 상황과 같은 ‘인문·사회적 요소’가 포함된다(김형준, 2016; 윤택림, 2017). 본 연구에서는 지역성을 탐색하는 방법으로 ‘역사·사회적 측면’으로서 지역사회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지역)사회운동이란 “구체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존 사회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하여 대중이 자발적으로 하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이며 지속적인 행위”(국립국어원)를 뜻한다. 사회운동을 “사회 환경을 바꾸려는 집합행동”으로 규정한 스멜서(Smelser, 1962)의 정의를 ‘공간’으로 확장해보면, 사회운동의 진원지란 사회환경을 바꾸려는 집단의 행위가 분출되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러한 장소들은 지역 기층민들이 주체가 되었던 집합적 기억을 담고 있어 장소 정체성을 형성하며 ‘지역성을 함축한 진원지’라고 볼 수 있다. 본 고에서는 이하 ‘진원지’라고 표기하고자 한다.

진주문화원 향토문화 연구소장인 강신웅(2017)은 ‘진주학(晉州學, Jinjuology)’ 창안을 주장하며, 진주의 정신을 ‘주체정신’, ‘호의정신’, ‘평등정신’으로 구분한 바 있는데(경남진주신문, 2017.12. 12.), 이는 지역사회운동과 관련된 진주민 고유의 의식세계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지역사회운동에 관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가 많지만, 경상도에서는 특히 경상남도 진주(晉州)를 꼽을 수 있다. 군사적 방어목적의 진주성으로부터 시작된 진주의 역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경상우도의 수부(晉州市史(上), 1995: 791)였으며, 조선조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경남도청의 소재지(1896~1925)이기도 하였다.

진주를 연구한 사회학자들은 그러한 행정중심 도시의 성격과는 별개로 진주지역을 지역사회운동의 선도 지역으로 평가하고 있다(김중섭, 1995; 김준형, 2001; 이혜숙, 2004; 진주농민항쟁기념사업회·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편, 2003). 진주지역은 ‘진주농민항쟁(1862)’의 시발점으로 ‘동학농민운동(1894)’의 계기가 되었고, ‘진주지역 3.1 독립운동(1919)’은 서부 경남 민족주의 활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전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소작노동자대회(1922)’는 농민운동의 활성화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진주지역이 시초가 된 백정의 신분해방을 추구하는 ‘형평운동(1923)’은 근대 인권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역사학과 사회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진주의 지역사회운동에 관한 연구들은 대부분 ‘운동’ 그 자체에 주목하였던 결과, 그 진원지들의 ‘장소 연구’로 연장된 사례는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진주지역의 지역성을 탐구하기 위한 초석으로, 근세 진주의 지역사회운동이 발생한 진원지가 당대에는 어떤 모습으로 역할을 하였는지, 현대 도시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장소연구로 확대하여 장소성을 읽고자 하였다.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던 지역사회운동 각 진원지들의 과거의 원형과 현재의 변화상, 그에 대한 지역 주민의 의식을 밝히고자 한다. 한 도시의 지역성을 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성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겠으나,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진주의 지역성의 한 측면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잠재력과 한계를 드러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대상지 개요

1) 조선조 시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진주는 진주목으로 불리었다. 세종 7년(1425)의 진주목 관할지역은 김해, 창원, 함안, 함양 등 12곳으로, 당시 진주목은 서부경남지역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의 진주목은 대읍(大邑)으로, 시가지의 중심에는 진주성이 위치해있었다. 임진왜란(1592~1593)을 계기로 군사기능의 경상도 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성내에 병영과 목은 공존하였다. 인조 13년(1635)에 이르러 분리되었는데, 성내의 병마절도사는 경상도 우병영을, 성외의 진주목사는 진주목을 통치하게 되었다(그림 1-a 참조).

Fig. 1.

Overview of site

진주성도1)에 표현된 진주목 읍치의 도로체계는 ‘진주객사(晋州客舍)’2)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김덕현, 2001; 강현재, 2008: 37; 진주도시계획사, 2008). 특히, 진주성내에 있던 목관아가 17세기에 성외로 이전하면서 진주객사의 중요성은 더욱 대두되었다. 조선조 읍치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객사, 동헌(목관아), 향교 등이 있는데, 그 중 임금의 위패를 모신 ‘진주객사’는 중앙집권적인 조선조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 내에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2) 일제강점기 시대

일제강점기 진주는 물리적으로 발전되었으나,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면서 지리적·행정적 위상은 크게 위축되었다. 경남도청이 위치한 진주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빠른 1911년부터 시구개정(市區改正)이 단행되어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晉州市史(中), 1995: 701).

조선조 읍치경관을 구성했던 남강 북쪽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남강 남쪽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일대에는 육조사거리와 도로가 개설되고, 교통시설과 근대시설 등이 들어섰다. 육조사거리가 조성되고, 이 일대에는 정미소와 공장, 조선총독부 업무수행을 담당을 위한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지금은 폐역인 옛 진주역이 신설되어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남부선이 개설되었다. 일제강점기 진주의 남강 남쪽에 형성된 신시가지는 당시 경성부의 부도심 역할을 했던 서울 용산과 조성배경이 유사하다.

또 다른 중심지는 조선조 읍치경관을 형성한 남강 북쪽권역으로, 매립된 대사지 위에 형성된 본정(本町)이라 불리었던 일인(日人)주거지일대이다. 본정 주변에는 진주읍사무소, 법원관사, 경찰서, 우편국, 은행, 진주좌(극장) 등 근대시설이 밀집하였다. 일본인 거주지일대 주변으로 시장(市場)이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번화가를 일컫는 대명사인 본정통이 서울의 충무로와 명동일대라면, 일제강점기 진주는 진주성 외성일대와 매립된 대사지 위에 조성된 본정이 번화가였다고 볼 수 있다(그림 1-b 참조).


Ⅱ. 이론적 고찰 및 연구방법

1. 장소 이론의 연구동향

본 절에서는 특정 지역의 지역사회운동 진원지 연구에 있어서 장소성 이론의 구체적 방법론과 그 적용 타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장소성 연구에 대하여 1980년대 이후의 국내·외 연구동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소는 지리적 ‘중심’ 또는 ‘점’의 의미를 함축(임승빈, 1991: 179)하면서 물리적인 환경의 범위가 지역에 비해 한정적이며,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중시함으로써 인문사회적 측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인문·사회적 요소가 종합된 지역성을 논하기에 앞서 거주민의 삶터로서 장소적 특성, 장소성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첫째, 1980년대 당시에 성행하던 과학적, 실증주의적 관점의 환경연구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간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인간주의적 개념은 주로 현상학에 뿌리를 가진 연구자들에 의한 장소 개념에서 시작되어 장소성의 형성원리에 관한 연구로 이어져 왔다(Tuan, 1979; Norberg-Schultz, 1980; Edward Relph, 1976; F. Steele, 1981). 인간에게 장소가 지니는 의미와 중요성을 역설한 렐프(Relph, 1976)에 따르면, 장소의 정체성은 ‘물리적 경관(physical appearance)’·‘활동(social activity)’·‘의미(cultural meaning)’라는 3요소의 결합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물리적 환경’과 ‘활동’은 쉽게 인식될 수 있으나, 인간의 의도와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의미’는 포착하기 어렵고, 또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장소성 연구의 난점이자 주된 특징이다(김덕현 외 옮김, 2005; 112-113).

1990년대 이후, 국내에서는 장소성 연구의 붐을 이루었는데, 이는 당시 지역성 연구와 연관된 것이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장소성에 관한 연구에서 앞서 언급한 렐프(Relph, 1976)의 정의를 가장 일반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석환·황기원(1997)은 렐프, 슐츠, 투안 등의 이론을 토대로 장소성 개념을 고찰하였다. 그는 장소성이 장소정신(집단)과 장소감(개인)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지역사, 지역성 연구는 역사학자와 사회학자 중심에서 인류학자가 주도하는 주민들의 구술생애사 연구로 확대되고 있다. 환경계획분야와 관련하여 지역성을 연구한 선행연구는 아직 미미한 상황이다. 김형준(2016)은 지역의 ‘형태적 요소’와 ‘인문학적 의미’를 통해 제주도의 지역성을 분석하였으며, 윤택림(2017)은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주민 일상생활’을 분석함으로써 신도시의 지역성을 도출한 바 있는데 사실은 장소성 연구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학자인 배형민(2015)은 지역성 또는 장소성 개념이 뚜렷한 구분 없이 혼용되어 사용되어 왔으며, 이들 개념은 어떠한 지역이나 공간영역이 특정한 존재감과 정체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닌다고 하였다(배형민, 2015: 29). 그러나, 허영란(2010)은 지역을 단일한 틀로 설명하기에는 내부가 너무 다층적이고, 다양성이 존재하는 혼성적 공간이라는 이유로, 거주민들의 삶을 구성하는 ‘장소성’ 연구가 보다 유용하고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허영란, 2010: 64).

둘째, 1990년대 장소담론은 “사회구성론적 관점”의 연구가 시도되었다. 강학순·박찬석(1992)은 안토니 기든스(A. Giddens, 1884)의 구조화 이론을 인용하면서 특정지역을 사회적 행위의 산물로 보는 구조화이론을 강조하였다. 인류학자 로우(Löw, 2008)는 형성된 공간에 대한 이용주체들 간의 다양한 경합과정을 분석하는 개념으로 ‘공간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김연금 외(2009)는 위의 개념을 서울의 인사동에 적용하여 인사동 경관의미의 변화를 특정 목적을 가진 행위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 해석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장소담론으로 “비장소(non-place)”에 관한 논의가 등장했다. 비장소의 개념은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 슈퍼모더니티의 인류학』(1992) 등을 통해 널리 거론되었다. 이는 최근의 신자유주의 시대 이래 도시민의 일상중, 지역간 교통, 공공, 상업공간의 많은 부분이 사람들의 면대면 교류없이 디지털의 코드화 방식으로 이용되면서 비장소화되어 가는 현상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 있다.

종합하자면, 국내·외 장소성에 관한 논의의 전개양상은 객관적인 지표로 공간을 측정하는 논리실증주의를 보완하고자 개인의 체험을 중시한 인간주의적 현상학적 방법에서 시작하였으나, 이 방법이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간과한다는 지적과 함께 사회구성론으로 논의가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지역성이 원래부터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용주체와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후 20세기 말 다국적 자본이 세계 곳곳에 침투하면서 전통적인 장소가 비장소로 변형되고 소멸되는 등 기존의 공간논리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여 장소연구를 다양한 관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2. 연구의 분석 틀 설정

본 연구의 이론적 근거는 기본적으로 렐프(Relph, 1976)의 ‘장소의 정체성’ 개념에 두고 있다. 이에 의해 진주지역 사회운동에 나타난 진원지의 장소적 특성을 규명하려 한다.

연구의 진행과 개념적 틀은 진원지의 지역사회운동 당대의 원형적 장소성의 규명과 이후 현재까지 변천특성의 규명의 두 단계로 구성된다. 진원지들의 초기 원형은 이후의 시대를 거치면서 보존되어 온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 가시적 경관과 소유권, 용도와 의미들이 크게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진원지의 위치와 원형은 고지도나 사진, 문헌 등을 통하여 추적하고, 그 장소성을 렐프의 이론인 ‘물리적 경관’, ‘인간활동’, ‘역사문화적 의미’의 세 측면에서 해석하려 한다.

이 중에서도 조선조와 일제 양 시대의 대표적인 운동 진원지 중, 변화상에 대표성이 있는 세 곳을 선정하여 심층연구를 통해 각각 그 물리적, 사회적 변천의 실제 전개과정을 추적하고 장소성의 변화를 해석하였다. 즉, 현재까지 위치와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곳(영남포정사 문루), 외관은 변형되었으나 용도는 유지되고 있는 곳(진주좌), 완전히 멸실 변형되어 장소성을 기억할 수 없는 곳(객사 앞 장터) 등이 대표적 장소이자 심층연구가 필요한 곳이다.

본 연구의 사회운동 진원지란, 사회집단의 의도가 반영된 ‘장소’로서 대부분이 이미 이전부터 공공성을 가지는 상징적 장소들이거나 시대조류에 따라 공공성을 가지는 장소로 만들어진 곳들이다.

따라서, 이 진원지들은 이후에도 사회적 의미가 더해져 지역민들에게 핵심적 공공공간의 성격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원형이 유지되어 온 곳도 있으나 대다수는 이후 100년여의 사회변동을 거치며 외관과 용도가 현격하게 바뀌거나, 공유지가 사유지로 소유권이 변경되고 따라서 장소성도 변질되거나 멸실되었다. 결과적으로 진주의 지역성을 왜곡하거나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시기별 지배세력의 고의적 변경도 있을 수 있고, 이용집단의 변화하는 요구 및 활동으로 그 의미가 새롭게 구성되기도 하였다(김연금 외, 2009: 93)는 사회구성론적 관점(Lefebvre, 1991)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공공의 기념비적 장소가 현대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적 교류와 의미가 거세된 비장소로 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Augé, 1995).

특히 원형적 측면에서는 당대 진원지의 가시성과 주변경관, 일상적 용도와 사회운동의 구체적 행동전개, 진원지의 본래 성격과 사회운동의 의미와의 부합성 등을 검토한다.

심층적 변천연구에서는 이에 더하여 진원지의 현재 형태와 주변경관, 소유권과 용도변화, 변경 당시의 시민여론과 현재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화요인과 관련된 주체별 역할과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앞 단계의 자료 외에 행정과 법규, 신문기사와 논설, 전문가와 주민 인터뷰 등을 통해 사실과 인식에 관한 실체를 밝히려 한다(표 1 참조).

Analytical Framework of Research

3. 연구의 범위와 방법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19세기 후반~21세기까지이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진주의 지역사회운동 시초는 진주농민항쟁(1862)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920~1930년대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따라서 전반부 진원지 장소원형 연구의 시간은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시점으로 하여 1945년 광복까지를 연구 전반부의 기간으로 설정하고, 후반부의 진원지 장소성 변천연구는 광복 이후에서 현재까지를 범위로 설정하였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내용적 범위와 연계하여 설정하였다. 즉, 진주 지역사회운동이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이 시기, 진주 행정구역을 대상으로 한다. 이중 조선시대 지역사회운동 진원지의 주 위치는 남강 북변, 주로 진주성과 그 북측의 조선조 진주의 중심시가지이며, 일부 진원지는 현 사천시 영역인 ‘고승당산’에도 위치한다. 일제 때의 사회운동 진원지도 대개 이 범위를 넘지 않으므로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현재 남강 북측 진주성곽과 그 북측의 조선조 읍치영역을 주대상으로 한다.

근대 이전 진주지역 도시공간형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9세기 후기에 작성된 회화식 지도인 『진주성도』(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를 참고하였으며, 근대 지도는 조선총독부가 昭和 8년(1933)에 발행한 진주군 지도를 이용하였다(국토지리정보원, www.ngii.go.kr).

다음으로 연구의 주요 텍스트들은 문헌자료와 지도, 사진자료를 이용하였다. 지역사회운동의 전개과정은 지역사회운동관련 언론자료, 역사연구 논문 등 문헌자료가 중심이었으며, 사회운동의 진원지에 대한 현황파악은 과거 시점에서는 고지도 및 사진 등을 이용하였고, 현재 시점은 현대지도와 사진, 답사를 통해 파악하였다. 문헌 연구의 주된 대상은 지역의 통사와 신문기록이다. 진주지역의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 통사로 진주시에서 편찬한『晉州市史』가 대표적이다. 현재 원문 검색이 가능한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동아일보』를 활용하였고, 광복 이후는 경남도민일보, 경남일보, 경남진주신문 등을 참조하였다.

현 시점에서 시민들의 진원지에 대한 장소인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역사문화관계 주요 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층인터뷰와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면담을 진행하였다.


Ⅲ. 근세 진주의 지역사회운동 전개

1. 지역사회운동 전개과정

본 절에서는 지역사회운동 진원지를 도출하기 위한 전단계로 조선후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진주지역에서 발생한 지역사회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한다. 지역사회운동의 발생 배경 및 운동의 주체세력에 대한 상세하고 입체적인 운동사를 서술함이 바람직하나, 지면의 한계상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사회운동의 성격 및 의의를 중심으로 요약하였다.

1) 조선후기 진주 지역사회운동

조선조 진주 지역사회운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반봉건적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에서 일제식민지에 대항한 반외세적 성격인 ‘항일운동’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보인다.

‘진주농민항쟁’은 1862년,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곧 삼정(三政)의 문란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2월 장날, 몰락한 양반이었던 유계춘(柳繼春)의 주도하에 ‘진주객사 앞 장터’에 통문(通文; 여러 사람이 돌려보는 통지문)을 붙이면서 진주농민항쟁이 시작되었다(진주농민항쟁기념사업회, 2003: 47). 이후 전국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어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이었다. 진주지역에서는 그해 9월 진주지역 동학군과 일본군이 고승당산(高僧堂山, 당시는 진주목 북평면, 현재는 하동군)에서 대규모 격전이 벌어졌다. 진주지역 동학세력은 1리마다 13명씩 모여 거의 천명이 모였으며, 진주지역 시내로 들어와 ‘진주성’을 점령했다(晉州市史(上), 1995: 746).

‘항일의병투쟁’은 1895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의병으로 가담하여 전국적 항일의병투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구 관찰사 이중하(李重夏)가 올렸던 상소에는 경남권 항일의병의 시작을 안동과 진주로 판단하고 있다. ‘진주·사천·고성 일대가 의병활동이 극성했던 곳으로 세 지역의 군세가 1만여 명에 달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진주의병은 그 규모가 최대였음을 말해 준다(晉州市史(上), 1995: 794). 이들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한반도 잠식 조약인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등에 맞서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행위에 맞서 싸웠다. 진주지역 항일의병은 외부세력과 토착세력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유생과 재주와 능력이 있는 서민이었다(晉州市史(上), 1995: 800). 결국 중앙에서 파견한 관군에 의해 ‘진주성’은 점령되고 3개월여에 걸쳐 펼쳐졌던 진주의 의병투쟁은 막을 내렸다(晉州市史(上), 1995: 783-835).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자발적으로 기금운동으로 일본의 국채를 갚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그 해 3월, 진주지역에서는 ‘진주객사 앞 의봉루(儀鳳樓)’에서 열린 연설회에 호응하여 진주기생 부용(芙蓉)은 동지들과 규합하여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보상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대한매일신보, 1907.03.20.). 특히, 진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은 백정 및 기생 등 피지배층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2) 일제강점기 진주 지역사회운동

일제강점기 진주 지역사회운동의 전개과정은 식민통치에 대항한 ‘항일운동’에서 진주지역 공동체를 위한 ‘문화운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진주지역 3.1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진주 장날을 이용한 시위군중은 2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은 ‘경남도청 앞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까지 진출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901). 진주지역 3.1 독립운동에 대하여 김중섭(1995)은 다른 지역보다 만세시위가 늦게 일어났지만,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독립운동이 서부 경남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소작노동자대회’는 1922년 9월, 전국 최초로 진주에서 열린 농민운동으로, 소작노동자대회는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렸으며, 소작 문제를 사회 쟁점으로 부각시켜 전국적인 노동운동으로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김중섭, 2008: 64).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백정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평등 운동이다. 백정과 사회운동가가 조직한 형평사가 중심이 되어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발기회를, 같은 해 5월 ‘진주좌’에서 창립기념식을 개최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913). 당시로는 진주에서 제일 큰 건물을 이용하여 행사를 거행하면서 전국에서 온 국내외 단체들을 포함한 4백여 명의 참석자가 모여 창립 축하식에 참석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914).

‘경남도청 이전반대운동’은 1925년, 부산으로 경남도청 이전에 반대한 진주민들의 지역공동체 운동이다. 진주성내에는 경남도청이 있었으나, 일제는 경부선을 축으로 식민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부산으로 이전계획을 확정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845). 진주민들은 도청이전 방지회를 결성하고, ‘진주좌’에서 시민대회를 열기도 하는 등 거센 반대운동이 발생하였다(동아일보, 1925.01.02.).

‘항일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동맹휴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진주지역에도 본격적으로 항일학생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0년 1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진주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계획하였고, 근처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함으로써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급증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904). 이후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학교)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문예지 ‘反逆(반역)’이라는 잡지를 비밀리에 간행하여 학생운동을 확대해나가기도 하였다(晉州市史(上), 1995: 908).

종합하여 근세 진주지역에서 발생한 사회운동의 주요 특징을 사회사적 성격으로 정리하면, 진주농민항쟁에서 출발한 농민운동은 항일운동, 인권운동, 문화운동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가진다. 이는 진주가 경상우도의 수부이자 경남도청이 소재한 지리적·행정적·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서 인근 마을에 사회운동을 전파하는 영향력을 가졌던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주에서 시작된 소작노동자대회 및 신분 불평등에 대항한 형평운동을 미루어 보아 인권회복을 되찾기 위한 진주민의 공동체 노력은 절실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각 사회운동의 성격, 전개과정 및 집단행위의 최대장소라 할 수 있는 진원지는 표 2와 같이 도출되었으며, 지도 위에 표기하면 그림 2와 같다.

Epicenter for Local Social Movement in Jinju City

Fig. 2.

Places of Social Movements from the Joseon Dynasty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2. 지역사회운동 진원지 장소특성

본 절에서는 조선후기 및 일제강점기의 각 지역사회운동에서 도출된 진원지별 장소특성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조, 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특성

조선시대 진주목은 서부경남 지역 일부 고을의 조세를 모아 전라·충청도의 앞바다를 통해 서울까지 운반하는 가산창(진주 남쪽의 부화곡리, 현재는 사천군)이 있었다(晉州市史(上), 1995: 651). 또한, 진주목에는 객사 앞 장터의 읍장(2, 7일)을 비롯하여 13개의 장이 있어 거의 매일 장이 설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여기저기 장이 겹쳐서 서고 있었다(晉州市史(上), 1995: 651).

조선 후기에 발생된 진주농민전쟁, 동학농민운동, 항일의병투쟁, 국채보상운동 등은 진주의 풍수상 주산(主山)인 비봉산(飛鳳山) 아래 위치한 ‘객사(客舍)’ 및 ‘객사 앞 장터’와 진주관찰사가 경상남도 업무를 보던 선화당을 중심으로 ‘진주성(晉州城)’ 일원 등이 사회운동의 진원지였다.

‘객사’ 및 ‘객사 앞 장터’는 조선조 권력과 대중의 상징적 장소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객사란 당시 임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이었고, 객사 앞 장터는 19세기 장시번성을 바탕으로 지역 내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주민과 상인들이 모여 집단시위가 가능한 가장 대중적인 장소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내에 설치하면서 군사기능과 행정기능을 총괄하였던 곳이다. 17세기에 와서 성내에는 병영이, 성외에는 진주목관아가 분리되어 통치되다가 갑오개혁 이후 우병영은 폐지되었다. 1896년 이후 선화당은 경상남도 도정의 행정청으로 약 30년간 사용되었으며, 외문의 문루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는 경상남도의 중심이었음을 상징하였다.

당시 지배층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를 점거하여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시각적으로, 지배층들에게는 정신적으로 위협을 줌으로써 투쟁하는 이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특정 장소가 선택되었다고 판단된다.

농민들은 불합리한 세상에 항거하며 변혁운동의 시발점으로서 그들을 지배하는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건물로 ‘객사’와 진주성내 ‘경상남도 청사와 문루’를 선택하였으며, 특히 ‘객사 앞 장터’는 집단시위운동이 발생하는 가장 실천적인 대중적 장소였다.

2) 일제강점기, 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특성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사회운동은 3.1 독립운동, 소작노동자대회, 형평운동, 경남도청 이전반대운동, 항일학생 등으로 진주읍내의 다양한 장소에서 발생하였다. 호주 선교인이 설립한 종교시설(진주교회), 경남지역 최초의 문화장소였던 공연장(진주좌, 晋州座), 청년들이 단결하여 개혁을 도모했던 시설(진주청년회관, 진주고등보통학교) 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 정치·행정의 중심역할을 했던 객사, 영남포정사 문루 이외에도 일본인 거주의 상업지역인 본정(本町)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분산되어 분포하였다. 이는 식민지이기는 하나 근대 일본식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권력이 새로운 근대적 종교 및 문화, 상업 기구로 대체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기존의 절대왕권을 상징하며 절대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던 정치적 장소의 장소성이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지역사회운동의 주체들은 기존의 장소가 가진 정치적, 경관적, 문화적 상징성을 활용하여 사회운동의 진원지로 선택하였다고 판단된다.


Ⅳ. 심층연구사례

앞에서 근세 진주의 지역사회운동의 양상과 배경이 된 사회운동 진원지를 도출하여 그 특성을 살펴보았다. 본 절에서는 심층연구를 통해 각각 그 변천의 실제 전개과정을 추적하고 장소성의 변화를 해석하려 한다. 특히, 보전되고 있는 곳(영남포정사 문루), 외관은 변형되었으나 용도는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곳(진주좌 앞 소광장), 완전히 멸실 변형되어 장소성을 기억할 수 없는 곳(객사 앞 장터)을 심층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아래에서 각 장소의 사회운동, 장소의 변형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1. 영남포정사 문루

영남포정사 문루(嶺南布政司 門樓)는 진주성내 위치한 2층의 누각이다. 1618년 건립된 영남포정사 문루는 군사기능인 경상도 우병영의 본관인 운주헌의 관문이었다가 1895년 진주 관찰부에 이어 1896년에는 경상남도청 관찰사의 본관인 선화당의 관문이 되었다.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라는 의미로,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부로 옮겨 갈 때까지 옛 도청자리를 의미한다(그림 3-a 진주시 참미디어 참조).

Fig. 3.

Yeongnam Pojeongsa Gatehouse’s Transformation

영남포정사 문루는 조선조에 이어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사회운동의 진원지였다. 조선시대에는 ‘항일의병투쟁’이 발생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1 독립운동’이 발발한 곳이었다. 현재는 옛 모습의 원형을 간직한 채 진주성에 현존하는 건물로 보전되고 있다(그림 3-b 참조, 촬영: 2018.8.14.).

그러나, 시민들의 활동과 장소적 의미측면에서는 큰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내 촉석루는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면서 국보 자격을 잃었다(경남도민, 2014.01.07.). 1963년에 이르러 뜻있는 지역인사들의 건의로 촉석루가 중건되면서 진주성은 사적 118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영남포정사를 포함한 6점이 도 문화재 자료로 등록되었다(경남일보, 2014.01.13.). 진주성은 국보의 가치는 상실했지만,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2013),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선(2013년~2018)에 선정되는 등 진주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인식하고 있다.

진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해 장소기억에 나타난 진주성의 경관이미지 변천을 연구한 하혜경 외(2018)는 과거의 진주성은 ‘시각적·지리적·역사적’ 상징성을 지닌다면, 현재의 진주성 경관은 그에 더하여 ‘일상적·활동적·관광적’ 성격이 강조되고 있음을 판단하였다. 특히, 진주성 일대에서 개최되는 개천예술제와 같은 지역축제와 최근 진행 중인 진주대첩기념광장조성사업은 ‘임진왜란 전투지’라는 이미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하혜경, 2018: 121).

‘영남포정사 문루’는 조선조와 일제강점기 지역사회운동의 진원지로, 4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외관과 소유권 변동 없이 진주성내에 ‘보전’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다만, 현재의 진주성이 도시자연공원3)으로 지정되어 일상적 공원으로 이용되고, 대표적 명소이자 지역축제 장소 등 관광성격이 강조되는 만큼 과거 영남의 행정중심지이자 사회운동 진원지로서 영남포정사의 상징성과 장소적 의미는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객사 앞 장터

진주객사(晋州客舍)는 조선조 읍치경관의 최고의 랜드마크로, 객사 앞에는 의봉루(儀鳳樓, 외삼문)가 있어 옛부터 풍류를 즐기던 이들의 명승지였다. 1862년 진주읍의 장날 통문을 붙이면서 진주농민항쟁이 촉발되었고, 항일의병투쟁(1895), 국채보상운동(1907)이 발생된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진주객사 앞 의봉루와 장터는 사회운동 주요 진원지였다(그림 4-a, b 진주시 참미디어 참조).

Fig. 4.

Jinju Guesthouse’s Transformation

객사 앞 장터 일대는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물리적 경관과 시민활동은 크게 변형되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갑오개혁(1894)으로 조선조 객사는 진주군수가 모든 소송업무를 처리하는 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재판소로 전용(轉用)되었다. 이후 을사보호조약(1905)으로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진주재판소의 기능은 항일의병을 탄압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이후 이 조직은 부산지방 사법기관의 하부조직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4)

일제는 오백년간 자리를 지켜오던 진주객사를 건물의 협소함을 핑계로 비밀리에 신축을 준비하였다(동아일보, 1931.08.12.). 당시 공사비는 오만팔천원이었으며, 1937년 10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이듬해 5월에 완공되었다(동아일보, 1937.09.30.). 허물어진 객사 위에 2층 벽돌건물의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청사를 신축하였다(그림 4-c 진주시 참미디어, 그림 4-d 일제 건축도면 컬렉션 참조). 광복 후 ‘부산지방검찰청 진주지청’으로 명칭만 변경된 채 1972년 이전하기 전까지 건물과 용도가 유지되었다.

진주법원이 이전한 그 자리에는 진주문화방송 건물이 신축되어 1981년부터 25년간 자리를 지켰다. 진주문화방송은 1969년 로터리클럽 회장 정영수를 주축으로 진주민간상업방송(약칭 JBC)이 개국으로 시작되었다. 1971년에 이르러 문화방송(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에 ‘가맹’하였지만, 설립배경은 지역민들이 만든 방송사였다(위키백과).5) 2004년 진주MBC가 이전하면서 진주시는 경제적인 이유로 매입을 사실상 포기하였고, 진주MBC는 건설회사에 매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주객사터의 소유권은 1972년 토지구획 후 ‘진주문화방송주식회사(1981)’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송국 이전을 계기로 소유자문제는 난항을 겪다가 최종적으로 아이비개발주식회사(2008)로 소유권이 넘어갔다(토지대장, 2018.10.30. 열람). 2008년도에 준공되어 현재까지 28층의 주상복합건물인 ‘롯데인벤스’가 입지해있다(그림 4-e 진주시 참미디어 참조, 그림 4-f 촬영: 2018.8.14.).

2004년 진주문화방송의 매각문제에 관하여 당시 진주시, 지역전문가, 진주시민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주시는 경제적인 이유를 근거로 공공장소로 복원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건설회사에 매각되기 전인 2003년, 진주객사 등 문화유산 복원의 필요성에 관하여 “객사를 복원하는데 드는 사업비는 총 약 160억원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되며, (중략) 시의 발전적 측면에서 효과적이지 못한 사업으로 평가하였다(진주시의회, 2003.11.26.).”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로 건립이 ‘발표’되자, 지역의 언론과 시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진주환경운동연합 등 9개 단체로 구성된 진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당시 상임대표 박노정)는 “초고층 주상복합빌딩이 들어서게 되면 주변 지역은 상습 정체지역으로 변하고, 도심 대기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였다. 아이비개발측은 “2개 동을 단일 디자인의 ‘탑상형(타워형)’으로 지어 진주의 새로운 명물”을 제시(경남도민일보, 2005.06.08.)함으로써 지역민들을 회유하였다.

2006년도 주상복합아파트 공사 진행 중 ‘진주객사터였음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이 발견되면서 진주지역 언론과 시민들은 또 다시 객사 복원의 필요성을 촉구하였다. 발굴에 참여했던 일부 전문가가 발굴된 적심석만으로 객사의 복원은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경남매일, 2006.10.18.). 게다가 문화재청이 발굴된 유적을 사업대상지 내 공원부지에 ‘교육자료로 활용할 것’을 권고함에 따라 주상복합공사는 중단 없이 진행되었다. 또한, 주상복합아파트가 건립되고 있는 현장에 진주객사를 원형대로 복원하게 된다면, 1,000억원이 넘는 예산을 진주시민이 떠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경남매일, 2010.10.11.). 이로써 객사복원을 위한 시민운동은 활발하게 활성화되지 못한 채 가라앉게 되었다.

진주문화방송이 이전하기 전, 시청자위원으로 활동하였던 김덕현의 증언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다. “진주문화방송 시청자위원을 하면서 문제제기를 했으나, 지역사회에서 공론화되지 못했습니다. 진주시민의 관심이 다소 적고, 방송 관계자들이 무시, 무관심으로 일관했는데, 진주문화방송의 영향력이 관계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 같으면, 시민운동을 통해서 공공장소 환원이 가능하리라봅니다(경상대학교 지리학과 명예교수 김덕현, 2018.11.19., 서면인터뷰).”

인근 상인들은 진주MBC의 매각에 따른 주상복합건물로의 신축에 대해 시장 상권이 활성화되고 시장을 중심으로 구도심이 개발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에 없던 큰 백화점이 들어섰고, 건너편에 문화방송(옛 객사자리)이 고급아파트로 된다 해서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다가고 싶어 했다(택시기사 강성민, 50대 남성, 2018.12.8.)”. “이쪽(주상복합건물 입구 건너편)으로 와서 19년인데, 고급아파트가 들어설 때 땅값도 뛰고, 장사가 더 잘될 줄 알고 기대했는데, 큰 변화가 없다(삼원장식 주인 조민선, 60대 남성, 2018.12.8.).”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 지 10년, 주변경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법원과 문화방송 때는 여기가 중심이었죠. 주변에 음식점이 많아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녔어(삼원장식 주인 조민선, 60대 남성, 2018.12.8.)”. “아파트로 바뀌고 사람들이 더 안보여. 이 (주상복합)사람들은 시장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서 해결한다 하더라(수정건어물 주인, 70대 여성, 2018. 12.8.)”.

‘객사 앞 장터’는 객사의 위용으로 조선조 진주목 읍치의 중심지이자 사회운동의 진원지였다. 광복 후에도 법원과 문화방송 등 공유지로 사용됨에 따라 진주 도심경관의 핵심지역으로 인식되었다. 2008년 진주문화방송 매각을 기점으로 민간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공유지는 사유화되었다. 역사적 장소에 대한 지역주민의 인식부족과 도시개발 기대심리, 지역언론과 시민단체의 뒤늦은 대응,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하는 지자체에 의해 진주지역 사회운동의 대표적 진원지로서의 진주객사의 장소성은 ‘멸실’되었다.

3. 진주좌 앞 소광장

진주좌(晋州座)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개관한 경남 제1호로 등록된 공연장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원지는 조선조 시기와는 달리 보다 다양한 장소로 분산되는데, 그 중에서 ‘진주좌(진주극장)’를 중심으로 사회활동과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진주지역은 시구개정으로 진주성 신북문 일대에 일인(日人) 주거지인 본정(本町)이 형성되었다. 당시 진주지역에 거주하였던 일본인 카츠타 이스케(勝田伊助)의 기록에 따르면, 진주객사가 있는 남북방향의 도로는 1910년대 초에 이미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13년 봄, 사천 선진항에 상륙한 나는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진주에 들어왔다. 남강 배다리를 건너니 이미 재판소(옛 객사자리) 앞까지 도심가와 본정거리(本町; 현 대안동)는 개수되었고,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도시시설도 갖추어져 벌써 살기좋은 고장으로 되어있었다.”(카츠타 이스케(박노정 옮김), 1989: 1)

일제강점기 진주좌는 위의 글에 언급한 본정거리 일대에 설립된 공연장으로 당대 지역사회운동이 발생한 진원지였다. 특히, 앞서 언급한 형평운동의 창립 기념회가 1923년에 개최되었으며, 1925년에는 부산으로 도청소재지 이전을 반대한 진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집합하여 시민대회를 열었다.

진주좌의 역할은 영화관람이나 공연과 같은 오락기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8월 진주소년소녀 가극대회에 ‘무궁화’라는 가극에서 수많은 조선인 관객들이 감격하여 박수를 보냈다(김경현, 1998: 227). 일본인의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독립과 관련된 문화공연을 감행했던 것이다. 광복 후,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종합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옛 영남예술제)의 주 무대로 진주극장이 활용되었다. 1963년에 개최된 개천예술제 기간 중에 진주극장에서 무용 경연대회가 열리고(경남일보, 2018.06.20.), 현충일 기념행사가 진주극장서 이뤄졌다는 기록이 있다(경남매일신문, 1967.06.09.). 이렇듯 진주좌는 다양한 사회운동 집회, 강연회, 시위장소로 활용되었다.

진주좌는 진주가 경남도청 소재지이지만 마땅한 공연장소가 없다는 점에 착안한 일본인에 의해 2층으로 된 일본식 목조 극장건물로 지어졌다(김경현, 1998: 228). 시장을 중심으로 진주읍사무소, 식산은행, 경찰서, 법원관사 등이 조성된 진주읍 시가지의 중심지에 위치한 당시로서는 2층의 대규모 건물로 가시성이 높았다. 또한, 진주좌 앞에는 수백명이 집결가능한 소광장이 있어 위치·규모·공간적으로 대규모 집회에 유리한 특성을 가졌다(그림 5-a 진주시 참미디어 참조).

Fig. 5.

Jinju Theater’s transformation

이후 조선인 영화업자 서종숙이 구 건물을 허물고 72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1937년에 새로 건립하면서 명칭을 ‘극장’으로 바꾸었다(晉州市史(中), 1995: 858). 폐쇄등기부 증명서 확인결과, 일본인 소유였다던 진주좌는 1943년 5월 15일날 소유자 ‘합명회사진주극장’6) 이름으로 매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토지대장, 2018.11.22 열람, 그림 5-b 참조).

‘합명회사진주극장’은 개인(가족)소유의 공간이었지만, 1960년대까지는 공공성을 지닌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개천예술제 행사는 진주문화예술회관, 남강 및 진주성 일대로 옮겨갔으며, 1990년대까지 진주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전문영화관이었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가시성이 뛰어나고 전면부 소광장 역할을 한 공개공지로 인해 1990년대에도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로 유지되었다. “진주극장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승용차 예닐곱대는 족히 설만한 광장이 있는 극장이었지요(경남일보, 1966.03.04. “진주의 영화관”).” 1970년과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에게 진주극장은 만남의 장소였다. “(진주극장을 떠올리며) 거기서 보자. 2시! 라고 말하곤 했죠(지의정, 40대 여성, 2018.10.11. 개인면담).” “지금은 협소하지만(복합쇼핑몰로 변경되면서 공개공지가 줄어듦, 연구자 주), 당시에는 넓어 사람들이 늘 모여 있었죠. 진주극장은 중심이었어요(하혜은, 40대 여성, 2018.12.08. 개인면담).”

2004년 대형쇼핑몰 ‘몰에이지 1030’으로 개장하였으나 개장 5개월 만에 저조한 분양실적과 금융부채로 인해 강제 경매 위기에 처했다(부산일보사, 2005.05.24.). 이듬해 2005년에 메가박스 영화관, 뉴캐슬 성인나이트 등이 포함된 복합상업시설로 변경되었다(그림 5-c 진주시참미디어 참조, 5-d 촬영: 2018.8.14.).

진주극장 매각에 관하여 당시 시민과 지자체, 전문가 등은 문제의식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극장 매각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문제제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주극장이 역사적 공공장소라는 인식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김덕현, 경상대 지리학과 명예교수, 2018.11.19. 서면인터뷰).” “최근 진주의료원(옛 진영터)은 매각되면서 진주지역에 사회문제로 제기되었어요. 백화점이 된 금성초등학교(옛 향청터)는 매각문제로 갈등이 좀 많았어요. 상대적으로 진주극장은 이슈화되지 못했던 것 같네요(추경화, 진주향토사, 2018.10.31. 전화인터뷰).”

진주극장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 대한 지역민들의 저조한 관심은 다음의 상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2년도에 진주좌터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진주극장 앞에 형평사운동 기념탑을 세우려 했으나 소유주와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경남일보, 2012.04.25.). 진주시장 상인들이 형평사운동 기념조형물 위에 광고물을 올려놓은 채 영업을 하고 있어 논란이 제기되었다(경남일보, 2013.10.18.).

‘진주좌 앞 소광장’은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의 진원지로, 일인(日人)거주지 일대에 설립된 대표적인 근대 문화시설이다. 1960년대까지 진주극장은 진주지역의 기념행사와 공연장 등 공공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 외관은 멸실되었고, 일부 층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어 용도만 유지되고 있다. 2004년 매각을 기점으로 진주극장은 대형쇼핑몰로 외관이 변하면서 소광장 역할을 하던 공개공지가 매우 협소해졌다. 이는 소유권은 사유지였지만, 공유지 성격을 가졌던 진주극장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이 더욱 옅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진주좌(극장)를 공공장소로 인식하지 못한 지자체와 시민들의 무관심과 지역전문가의 소극적인 태도로 장소성은 ‘변형’되었다.

4. 심층사례 연구의 종합

심층사례 연구에서는 조선조와 일제의 양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운동 진원지 중, 변화상에 대표성이 세 곳 -현재까지 위치와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곳(영남포정사 문루), 외관은 변형되었으나 용도는 유지되고 있는 곳(진주좌), 완전히 멸실 변형되어 장소성을 기억할 수 없는 곳(객사 앞 장터)- 으로 선정하여 각 장소 변천의 전개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장소성의 변화를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표 3 참조).

Usage change of site

1. ‘영남포정사 문루’는 400년간 물리적으로 큰 변화 없이 진주성내에 ‘보존’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시민활동은 ‘변화’하고 있는 사례지이다. 조선조와 일제강점기에 지역사회운동의 진원지로 진주성내 군사기능인 경상우병영의 관문이자, 일제강점기 경남도청사 자리를 상징하는 관문이었다. 영남의 행정중심지를 상징했던 위상으로 지역사회운동의 진원지가 되어 동학농민운동과 3.1 독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은 영남포정사 문루 앞을 중심으로 진주성 일원에서 전개되었다.

최근 진주성일대에서 진행 중인 진주대첩기념광장사업과 개천예술제, 관광장소로서 진주성은 ‘임진왜란 전투지’라는 역사적 사실만을 반복적으로 기억하려고 한다. 따라서, 근대초기 경남의 행정중심지이자 지역사회운동 진원지가 되었던 영남포정사 문루를 내부인(지역민)과 외부인(관광객)에게 보다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2. ‘객사 앞 장터’는 현재 물리적 경관은 ‘멸실’되었으며, 소유권과 용도변화에 따른 시민활동을 ‘상실’한 사례지이다. 진주객사는 조선조 왕권을 상징했던 곳으로, 사람들의 활동성이 높아 객사 앞에 형성된 장터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과 3.1 독립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객사는 일제강점기에는 근대적 사법기관으로, 광복 후 진주법원에서 진주문화방송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2008년 진주문화방송 매각을 기점으로 민간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사유화되어 주상복합아파트가 입지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복합 상업시설로의 변경이 곧 상권 회복이자 도심개발이라고 생각한 당시 지역주민들과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한 지자체가 있었다. 최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객사와 주산인 비봉산 일대에 대한 복원의 필요성(경남일보, 2015.04.04.)에 관한 지역의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으므로, 공공장소로의 환원에 대한 시민사회의 개선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3. ‘진주좌 앞 소광장’은 현재 외관은 멸실되었으나, 용도는 유지되고 있는 ‘변형’된 곳으로, 공공용도 상실과 건물 외관 변형으로 시민활동이 ‘축소’된 사례지이다.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에서 최초로 시작된 백정의 인권보호를 위한 형평운동의 시발점이며, 부산으로 경남도청 이전에 반대한 진주민들이 대규모 장기 집회가 있었던 곳이다. 진주좌는 진주성 외성과 매립된 대사지 위에 조성된 일본(인) 중심 구역(本町)에 위치한 경남 제1호 공연장이었다. 진주읍의 핵심구역에 위치한 대규모 시설과 소광장이 조성되어 있어 행인들을 모으는 랜드마크(landmark)가 될 수 있었다. 광복 후에도 영남예술제의 공연장소로 사용되는 등 1960년대까지 진주극장은 ‘진주의 얼굴’로서 진주의 역사와 함께한 공공장소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평범한 복합쇼핑몰로 사용 중이다. 일부 형평운동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지자체, 지역민들은 이곳을 역사적인 공공장소로 인식하지 못하므로 추후 진주좌가 지닌 장소의 역사성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Ⅴ. 결론 및 고찰

본 연구는 진주지역의 지역성을 탐구하기 위한 초석으로, 근세 진주의 지역사회운동이 발생한 진원지를 도출하여 장소연구로 확대하여 장소성을 읽고자 하였다. 기존 연구에서 소홀히 다루어졌던 사회운동의 각 진원지들의 원형과 변화상과 그에 대한 주민과 전문가의 의식을 밝힘으로써 진주지역 지역성의 한 단면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이론적 함의는 기존의 장소성 개념을 ‘원형’으로 전제한 후, ‘장소성의 변천’으로 확장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즉, 렐프(Relph, 1976)의 장소 정체성 3요소인 ‘물리적 경관(physical appearance)’·‘활동(social activity)’·‘의미(cultural meaning)’를 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성의 원형’ 개념으로 보았다. 르페브르와 로우의 ‘사회구성론적 관점(1991, 2000)’과 오제의 ‘비장소 개념(1995)’은 사회운동 진원지의 ‘장소성의 변천’을 탐색하기 위한 부개념으로 보완함으로써 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심층사례 연구에서는 조선조와 일제의 양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운동 진원지 중, 변화상에 대표성이 세 곳을 선정하여 각 장소의 변천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장소성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변화상에 대표성을 지니는 세 곳을 선정하여 심층적으로 살펴본 결과 현재 각 장소들은 물리적으로 변형·소멸되었고, 보전된 경우에도 장소적 의미가 약화되는 등 역사문화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 과정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개발경제 시대를 지나오면서 전통경관의 해체는 곧 ‘근대화를 위한 개발과정’으로 바라보는 지자체와 일부 지역민들의 입장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근세 진주의 지역사회운동 진원지들은 역사적 공공성을 지닌 ‘장소자원’이자 ‘공공장소’였지만, 심층사례 분석결과 현재는 장소적 의미가 상실되었거나 약화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진주 도시경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도시 이미지를 강화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실천적 자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 연구의 한계점으로는 폐쇄등기부의 기록부재로 일부 대상지의 소유권 변경과정을 본고에서 직접 밝히지 못하고, 2차 자료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운동 진원지의 용도변경에 대한 일제강점기 당시 진주민들의 여론을 충분히 밝히지 못하였는데, 이는 식민 지배로 인한 언론 탄압 및 검열과정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까닭으로 지역민들과 지역전문가들의 사건·장소 기억은 주로 근대 이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추후 연구에서는 본 연구를 바탕으로 각 진원지들을 연계하여 환경계획측면에서 장소 정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대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대형쇼핑몰, 대형고급아파트, 테마파크 등 비장소(non-place)에 관한 논의가 등장한 시점에서, 전통적인 장소가 비장소로 변형되는 문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또한 후속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나아가 본 연구를 바탕으로 진주지역의 근세-근대시대의 역사환경을 보전하고, 활용하기 위한 새로운 지역사회운동이 재가동되기를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본 논문에 대해 유익한 논평을 해 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Notes
주1. 근대 이전 진주를 묘사한 진주성도는 약 20개의 지도가 있다. 지도의 화질이 선명하고 건물의 명칭이나 도로체계가 자세하게 묘사된 지도인 19세기 후기에 작성된 회화식 지도인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을 적용하였다.
주2. 진주객사의 정확한 초축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도 진주목 읍지인 진양지(1692년 편찬)에 따르면, ‘진주객사는 비봉산(飛鳳山)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3. 현재 진주성은 진양호공원, 월아산공원, 선동공원과 함께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4. 1909년 11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로 개칭되었고, 1910년에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 진주구재판소’로, 1912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 개칭되었다.
주5. 1980년 언론통폐합 당시 군사정권에 의해 문화방송 전체 주식의 70%를 KBS가 인수하였고, 나머지 지분은 정수장학회에 헌납되었다. 진주MBC는 지역의 독립된 민간방송사로 출발하여 준공영방송체제로 전환하게 되었고, 2011년 창원MBC와 강제합병되어 경남MBC가 되었다.
주6. 대한민국 상법에 따라 회사는 합명회사, 합자회사, 유한회사, 유한책임회사, 주식회사의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이 중 합명회사(合名會社)는 가족 또는 친척이나 친구와 같이 극히 친밀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을 지칭한다(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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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Fig. 1.
Overview of site

Fig. 2.

Fig. 2.
Places of Social Movements from the Joseon Dynasty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ig. 3.

Fig. 3.
Yeongnam Pojeongsa Gatehouse’s Transformation

Fig. 4.

Fig. 4.
Jinju Guesthouse’s Transformation

Fig. 5.

Fig. 5.
Jinju Theater’s transformation

Table 1.

Analytical Framework of Research

Table 2.

Epicenter for Local Social Movement in Jinju City

Table 3.

Usage change of site